[유홍준의 문화의 창] 동농 김가진의 ‘백운서경’

2024. 8. 29. 00: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지금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서예전이 열리고 있다(9월 19일까지). 우리나라 근대 서예가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전이 열린 것은 위창 오세창 이후 처음이다. 위창이 전서에서 당대 일인자이었다면 동농은 행초서의 대가였다.

동농이 서예의 대가였음은 당대의 명성이 그러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말해준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비롯한 정자 19곳의 현판과 주련, 안동 봉정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 관아 현판이 그의 글씨로 되어 있다.

동농 김가진 서예전 전시장에서 작품해설을 하는 유홍준 교수.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독립문 앞뒤 면의 한글, 한자도 동농의 글씨로 알려져 왔다. 동농의 며느리로 상해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던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1924년 한 신문에 '내 동리 명물'을 소개하면서 동네 한 주민의 말을 듣고 '독립문은 이완용 글씨라더라’라는 기사가 한 줄 나온 것이 있어 혼선이 생겼다. 아직 문헌 기록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서체로 보면 동농의 필체가 역력하다.

「 근대 서예사에서 행서의 대가
창덕궁 정자 현판, 독립문 글씨
74세에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3대에 걸친 독립운동 투신 가문

동농 김가진 글씨로 전해지는 독립문 현판.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그런 동농 김가진이건만 사후 100여 년이 지나 이제 처음으로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 서예와 근대 인물에 대해 무관심해 왔음을 말해준다. 동농에게 참으로 미안하기만 한 일이다. 동농은 서예가이기 이전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나라의 큰 어른이다. 당시엔 국로(國老)라 했다.

동농은 안동 김씨 명문가 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다. 김상용은 청음 김상헌의 친형으로, 서울 청운동 청풍계의 주인이다. 동농은 문과에 급제하여 왕조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관료로 황해도 관찰사, 농상공부 대신까지 지냈다. 특히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외교관이었다.

동농 김가진이 쓴 창덕궁 관람정 현판.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그런가 하면 애국계몽 운동가로 독립협회에 참가하였고, 1908년 대한협회 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1910년 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두문불출하고 울분을 삼키며 지냈다. 이 시기 동농은 많은 서예작품을 남겼다.

그러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칩거를 박차고 일어나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 일제에 대항하다 마침내 11월에 74세 노구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길에 동농이 쓴 시가 ‘독립신문’에 실려 있다.

백운동천 전경.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도다/ 치욕스러운 마음으로 죽지 못해 여태 살아왔다만/ 비록 몸은 늙었어도 아직 하늘 찌를 뜻이 있어/ 단숨에 몸을 솟구쳐 만리 길을 떠나노라.”

동농 김가진 초상.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대환영하며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모셨다. 왕조의 대신 중 유일하게 임시정부에 참여한 국로였다. 그 후 3년 뒤인 1922년 동농은 세상을 떠났고 임시정부는 최초의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이런 역사적 인물이 잊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동농의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아들 김의한은 부친이 망명할 때 길눈이로 따라가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지냈고, 뒤이어 며느리 정정화도 합류하여 안살림과 독립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 태어난 손자 김자동은 ‘영원한 임시정부의 소년’으로 훗날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문이다.

백운동천 탁본.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그나마 당신이 서예의 대가여서 전시회를 꾸며 세상에 다시 부활시키고 있으니 역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겠다. 동농은 어려서부터 역대 대가들의 글씨를 본받는 수련이 있었고 서예가라는 작가의식이 분명히 있었다. 동농의 행서는 멋을 부린 것이 아니라 서예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대자(大字)는 단정함 속에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서울성곽 창의문 아래 백운동 골짜기 큰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암각 글씨는 희대의 명작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를 탁본하여 전시하고 전시회 이름을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 하였다.

동농 김가진 서예전 전시장 전경.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동농 김가진 서예전은 동농의 대표작들과 함께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문의 귀한 자료들도 많이 전시하였다. 전시회 주최 측은 서예라는 장르가 어렵고 또 젊은 관객들은 한문에 낯설기 때문에 매주 화요일마다 전시운영위원인 이동국(경기도박물관장), 김채식(경운초당 대표), 그리고 나, 3인의 작품해설이 있고 특강도 있다(예술의전당 홈페이지 참조).

동농 김가진 글씨로 전해지는 독립문 현판. [사진 동농문화재단, 유홍준]

많은 분들, 특히 MZ세대들이 찾아와 74세의 나이에 모든 권세와 재산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농 김가진의 거룩한 삶을 기리며 서예의 아름다움을 배워가기 바라는 마음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