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세계경제전망] 미국 금리 인하 사이클·엔화 강세, 2차 청산 부를 수도
블랙 먼데이 부른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통화로 자금을 조달해 금리가 높은 국가나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을 뜻한다. 1999년 일본이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제로금리에 진입하면서 엔화를 싼값에 빌려 달러화 등 각종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캐리 트레이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후 엔 캐리 트레이드는 일본과 다른 국가의 금리차와 엔화 가치의 흐름,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에 따라 투자와 청산의 사이클을 오가며 시장을 흔드는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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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금리·엔저로 엔화 유동성 증가
달러·빅테크 주식 투자로 몰려
BOJ 기준금리 인상과 엔화 강세
자산 리밸런싱 부추겨 시장 요동
엔 캐리 자금 규모 가늠 어려워
JP모건 “75%가량 청산” 추정
」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지난 5일 블랙 먼데이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건 2021년 이후 늘어난 엔화 유동성에 기인한다. 일본은행(BOJ)의 양적완화(QE) 확대 속 저금리의 엔화 자금이 시장에 넘쳐났다. 반면 이 시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 사이클에 진입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는 확대됐다.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가 커진 배경이다. 수퍼 엔저 현상은 엔 캐리 트레이드 급증에 기름을 부었다. 2021년 이후 일본의 해외 순투자 금액이 늘어난 것도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투자한 자산은 미국 달러와 멕시코 페소, 뉴질랜드 달러 등으로 달러-엔 캐리 트레이드의 연간 수익률은 5~6% 수준이다. 빅테크 주식도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타깃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헤지펀드 등은 싼 엔화 자금을 조달해 그동안 수익률 고공행진을 했던 미국의 빅테크 주식을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iM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2021년 이후 엔 캐리 트레이드가 본격화하면서 달러-엔 환율과 나스닥 지수의 동조화 현상이 강화됐다”며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과거처럼 신흥국 시장으로 유입되기보다 달러 혹은 기술 혁신 사이클 관련 자산에 투자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지적했다.
엔 캐리 청산에 ‘엔화 숏스퀴즈’ 급등
싼값의 엔화 자금에 취해 있던 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Fed의 금리 인하가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BOJ가 긴축으로 방향을 틀면서다. 지난 3월 BOJ가 8년 만에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난 뒤에도 흔들리지 않던 시장에 방아쇠를 당긴 건 지난달 31일 BOJ의 ‘깜짝 금리 인상’이다. 시장의 예상보다 빨리 기준금리를 0~0.1%에서 0.25%로 인상하자 투자 심리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1~12일 일본 외환 당국이 시장 개입을 통해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며 엔저 정상화 의지를 드러내며 시장의 긴장도는 이미 높아진 상태였다.
일본의 금리가 상승하고 다른 국가의 금리가 하락할수록, 엔화 가치가 오를수록 엔 캐리 트레이드 여건은 나빠진다. 내야 할 이자가 늘어나는 데다, 더 비싼 값에 엔화를 사들여야 빚을 갚아야 하는 만큼 이익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빚과 이자를 갚기 위해 팔아야 하는 자산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엔화 강세와 깜짝 금리 인상은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이어지며 당장 엔화 약세에 베팅한 투자자들이 나가떨어졌다. ‘엔화 숏스퀴즈’가 급증했다. 숏스퀴즈는 자산 가격 하락에 베팅한 공매도 투자자가 가격이 뛸 때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해당 자산을 사는 것이다. 금융결제업체 콜페이의 수석 시장전략가인 칼 샤모타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9일은 17년 만에 가장 큰 엔화 숏스퀴즈가 발생했다”며 “레버리지 펀드를 비롯한 투자자가 2007년 8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엔화 약세 베팅을 청산했다”고 말했다. 엔화가치 정상화를 가로막았던 투기 세력에 BOJ가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충격은 투기 세력만 받은 게 아니다. 일본 증시도 강타했다. 엔화가치 변동 헤지를 위해 일본 주식에 투자했던 상장지수펀드(ETF)에서는 지난 5~9일에만 4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2018년 이후 주간 최대 자금 유출이다. 미국 증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블랙먼데이에 발생한 빅테크 주가 급락에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후폭풍이 영향을 미쳤다.
‘BOJ 금리 인상=엔 캐리 청산’ 신호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한 BOJ의 금리 인하와 엔저 정책이 엔 캐리 트레이드를 늘리고, 이후 풀었던 수도꼭지를 잠그면 시장은 몸살을 앓았다.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벌어진 각종 이벤트와 함께 BOJ의 금리 인상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KB증권 등에 따르면 첫 번째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0월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2001년 하반기~2002년 초반이다. 1999년 제로금리를 단행한 BOJ는 경기가 다소 회복되자 2000년 8월 기준금리를 0.25%로 인상했다. 미국의 IT 버블 붕괴와 9·11 테러 등으로 커진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시너지 효과를 냈다.
세 번째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세계금융위기와 맞물린 2008년 4분기~2009년 1분기로 추정된다. 2000년대 중반 세계 경기가 개선되자 BOJ는 기준금리를 2006년 7월 0.25%로, 2007년 2월 0.5%로 인상했다. BOJ의 금리 인상 기조 속 서브프라임 사태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2~3개월 진행되며 미국 주식시장 급락을 야기했다.
네 번째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2016년 이후다. 2015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첫 금리 인상에 나섰던 Fed가 1년여의 동결 기조를 깨고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서며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5~16년 중국 주식 급락과 2016년 브렉시트 등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된 영향이 컸다. 코로나19팬데믹 확산 시기인 2020년 6월에 다섯 번째 엔 캐리 트레이드가 있었다고 시장은 평가한다.
광의의 엔 캐리 자금 수조 달러 주장도
이제 관심은 이달 초 벌어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종료 시점이다. JP모건 퀀트팀은 지난 5~9일 사이에 엔 캐리 트레이드의 75%가량이 청산됐다고 추정했다. JP모건체이스 외환전략팀은 50~60%, 스코샤뱅크는 50% 정도 청산됐다고 추산했다.
문제는 이런 추정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은 엔화 대출 잔액이나 일본 거주자의 해외 증권 투자, 선물거래 포지션 등으로 추정은 하지만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로이터통신은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규모는 아무도 모르고, 실제 포지션은 증폭돼 나타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때문에 광의의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수조 달러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KB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과거에는 엔 캐리 트레이딩이 협의의 투자 전략이었다면, 관련 수익이 누적된 가운데 레버리지가 더해진 광의의 개념이 되어 영향력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일본 금리 상승(대외 금리 차 축소) 및 엔화 강세→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관련 레버리지 투자 디레버리징→금융시장 충격→엔화 강세→금융시장 충격’의 순환 구조 속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 각종 시나리오도 등장했다. 국제금융센터가 주요 엔 캐리 트레이드 추정 지표를 활용해 추산한 예상 청산 규모가 그중 하나다. 과거의 최대 감소 사례를 적용해 예상한 것이다. 첫 번째 지표는 글로벌 은행들의 국경 간 엔화 대출 잔액이다. 지난 3월 말 기준 41조1000억엔(2713억 달러)으로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대차대조표 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의 상한선에 해당한다. 2021년 6월 말(25조3000억엔) 이후 2년 9개월 만에 62%(15조8000억엔) 늘어났다. 과거 최대치(7분기 동안 26%) 정도로 줄어든다고 하면 앞으로 21개월간 월평균 35억 달러가 상환될 것으로 추정됐다.
위안화 캐리 트레이드 눈 돌리는 투자자
두 번째는 지난 3월 말 기준 34조3000억엔(2269억 달러)인 일본 거주자의 대외 단기 엔화 대출이다. 과거 최대치(2년 동안 59%)를 적용해 추산하면 24개월간 월평균 58억 달러가 상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해당 자금 전체를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세 번째로 일본 가계 부문의 해외 금융자산 보유 잔액(3월 말 기준 90조8000억엔)에 과거 최대치(5분기 동안 27%)로 추산할 경우 최대 15개월간 112억 달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예상이 나왔다.
국제금융센터는 “단기 변동성을 일으킬 수 있는 파생상품 포지션은 상당 비중 청산됐고 증권 투자를 통한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글로벌 자금 흐름을 주도할 만큼 규모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추가 청산이 글로벌 금융 불안의 진앙으로 작용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이영주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본격화하면 엔화 강세 기대가 2차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엔화가 캐리 트레이드의 대표 주자 자리를 내줄 가능성도 있다. 투자자들이 싼값에 조달할 수 있는 위안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 CNBC는 “위안화가 엔화 다음으로 잠재적인 캐리 트레이드 대상이 될 수 있고, 시장이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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