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호의 법과 삶] 탁상공론식 ‘환자 소통법’ 논의
‘종현이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아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가 성공해 완전 관해(암세포가 관찰되지 않음)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재발 방지를 위해 12차례에 걸쳐 정맥 주사제 시타라빈과 척추강 주사제 빈크리스틴을 투여받는 유지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11회를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12번째 주사를 맞으러 입원했다. 이번만 마치면 골수이식 없이 90% 이상 완치가 가능하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아이가 주사 후 갑자기 발열, 두통, 엉덩이 통증을 호소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하지부터 시작된 마비 증상이 전신으로 악화하고, 급성뇌막염이 발생해 급사했다. 의료진은 이유를 알 수 없다고만 하였다. 여러 경로로 알아보니 전공의가 정맥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타라빈을 척추강으로 잘못 투약한 탓이었다. 병원은 그 사실을 숨기고 척추치료를 하지 않았다. 진료기록에는 시타라빈과 빈크리스틴은 정맥과 척추강에 제대로 투약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종현이의 임상 증상 이외에는 시타라빈이 척추로 잘못 주사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
「 의료사고에 환자들 속수무책
의료기관은 사과·설명 소극적
법 있지만 벌칙 없어 유명무실
」
2010년 세상을 떠난 정종현 군(당시 9세)의 의료사고 내용이다. 외국에서도 정맥주사와 척추주사가 바뀌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시타라빈은 월요일, 빈크리스틴은 화요일 등 요일을 바꾸어 투약하도록 하자 원천적으로 오투약 사고가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환자안전 진료지침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전에도 잘못된 항암제 투약으로 사망사고가 있었지만, 의료진의 함구와 재발 방지 지침 부재로 유사 사고가 반복되었다. 종현이 엄마는 생업을 포기하고 암 환자들의 도움을 받아 입법촉구 활동에 나섰고, 결국 2016년 환자안전법이 제정됐다. 이른바 종현이법이다.
그러나 환자안전법은 의료계의 반발을 의식한 나머지 강제신고 의무와 처벌 규정을 두지 않는 바람에 강제력이 없다.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일부 의료기관 인증평가를 받는 병원에서 이 법에 따른 환자안전지침을 만들어 오투약 사고, 수혈 부작용, 마취 위해 사고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적정진료관리위원회나 병원운영위원회에 보고하고는 있다. 대신에 적지 않은 환자안전관리비용을 지원받는다. 환자안전관리지침은 환자가 의료사고로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되면 보호자에 그 내용과 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재발 방지 및 향후 조처를 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대로 운영되는 의료기관은 거의 없다.
이런 실패를 경험했으면서도 정부는 최근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서 ‘환자 사과법’, ‘환자 소통법’을 논의하고 있다. 의료사고 발생 초기부터 의료인이 환자와 충분히 소통하여 불필요한 분쟁을 미리 방지하자는 조항을 의료분쟁조정법(의료사고피해구제및의료분쟁조정등에관한법률)에 신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소통을 거부하거나 사실과 다른 설명을 하는 의료인에 대한 형사처벌, 의료인면허 취소·정지에 관한 논의는 없다. 즉, 강제성이 없는 것이다. 환자가 의료사고라고 신고해도 병원은 과실이 없었다고 변명하기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강제규정도 없이 임의로 소통하고 사과하라면 결과는 뻔하다. 제2의 환자안전법 신세가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설사 법이 제정되더라도, 소통·사과할 마음이 없는 의료인에게 이를 강요하는 규정은 헌법상 자백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위헌이 될 소지가 있다. ‘환자소통법’은 의료사고 피해를 본 환자들에게 실체적 진실을 알리고, 재발 방지와 적절한 배상이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의료기관 달래기용으로 입법되면 세금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환자안전법은 이미 “환자는 안전한 보건의료를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 논의되는 환자소통 관련 조항은 의료분쟁조정법이 아닌 환자안전법에 넣어야 한다. 환자안전법에 환자에 대한 설명 및 소통 의무를 강제하고, 불이행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실효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대신 자진 신고하는 의료인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가입자들이 낸 의료사고배상위험료에서 배상하도록 유인책을 같이 만들어야 한다. 자진 신고와 배상이 선순환되도록 해야 한다. 구조적 문제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인력과 재정 지원을 통해 재발책을 찾으면 의료분쟁과 배상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고, 동시에 의료인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 환자소통법이 의대 증원 관련 의료인 불만 달래기용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처벌과 보상이 조화를 이루는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 종현이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환자안전법이 입법목적 그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한다.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법학박사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세리 이기심이 골프 키웠다…안세영 분노, 누가 돌 던지랴 | 중앙일보
- 불륜 이혼후 여배우 3명과 동거…그 배우,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다 | 중앙일보
- "호텔방 금고 절대 믿지마라" 국정원 요원의 경고 | 중앙일보
- 송일국도 경고 나선다…"숨쉬기 힘들어" 탄식 쏟아진 충격 재난 | 중앙일보
- 화장 고치다 말고 '삐끼삐끼춤'…외신도 주목한 기아 치어리더 | 중앙일보
- 퇴근하면 강물로 풍덩…수영해서 집에 간다는 '이 나라' | 중앙일보
- 300만뷰 터진 '딥페이크 지도'…2시간만에 만든 개발자 깜짝 정체 | 중앙일보
- 주거침입으로 붙잡힌 경찰…13년 전 놓친 강간범 DNA와 일치 | 중앙일보
- 2500만원→450만원, 일등석 항공권 득템하자…항공사서 온 연락 | 중앙일보
- "두바이초콜릿 있어요?" 물은 편의점 강도, 미리 경찰 신고 왜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