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마르지 않는 물감, 내 AI 작품선 향기도 난다”
층고 10.8m 벽면에 걸린 세 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색 입자가 쏟아질 듯 일렁거린다. 좌우 화면에는 때때로 꽃잎이나 산호·새·폭포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가운데 추상적인 화면과 대조를 이룬다. 기계가 자연을 꿈꾼다면 어떤 모습일까. AI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39)의 신작 ‘기계환각’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오늘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AI(인공지능) 모델을 볼 겁니다. 자연의 이미지로 소리도 내고, 향기도 내뿜게 됩니다.”
27일 서울 북촌로 푸투라(FUTURA) 서울에서 만난 아나돌은 자신의 아시아 첫 개인전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아마존·아프리카·동남아 등 전 세계 16곳의 우림에서 사진·소리와 3D 스캔 데이터 등을 수집하는 장면이 흘러갔다. 이어 긴 복도 양쪽 화면에서 10분당 5억 개의 자연 이미지가 쏟아졌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오픈소스 생성형 AI 모델인 ‘거대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l·LNM)’을 시각화한 것이다.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모델 ‘거대 언어 모델(LLM)’처럼 자연의 이미지를 학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는 설명이다. 아나돌은 올 초 다보스 포럼에서 이 LNM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 3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연 전시의 한국판이다. 5주 동안 열린 서펜타인 전시에는 7만 명이 몰렸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공동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이날 온라인 메시지를 통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레픽의 작품은 미디어가 문화적 격차를 줄이고 새로운 문화를 열어줄 수 있다고 한 백남준의 비전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기계환각’이 상영되는 마지막 전시실에서 아나돌은 소나무숲을 연상시키는 냄새를 시향해 보이며 “이번 전시에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4년째 축적해 온 자연의 향 분자 데이터에서 AI 모델이 수많은 향을 만들었고, 인간인 내가 이번 전시에 맞는 걸 택했다”고 덧붙였다.
AI 관련 가장 오래된 기억은 8살 때 어머니가 빌려온 ‘블레이드 러너’ 비디오를 꼽았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사촌의 설명을 통해 영화를 겨우 이해했다. 안드로이드(인조인간)에게 ‘네 기억은 실은 다른 사람의 것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돌아봤다. 이스탄불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한 그는 27세에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 된 미국 LA로 갔다. UCLA에서 미디어 아트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지난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그의 작품 ‘비지도(Unsupervised)’는 AI 예술의 주요 미술관 입성으로 화제를 모았다. “MoMA의 소장품을 본 기계는 어떤 꿈을 꿀까”라는 주제의 이 머신 러닝 영상 앞에는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논란도 따랐다.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는 이 작품을 “50만 달러짜리 화면 보호기”라고 혹평했고, 아나돌은 엑스(X·옛 트위터)에서 “챗GPT도 당신보다 글을 잘 쓰겠다”고 맞섰다. 이에 대한 질문에 아나돌은 “백남준의 작업도 때론 혹평에 부딪혔겠지만 그걸 이해 못한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세계는 클리셰를 넘어 새로운 미디어를 개척하는 사람과 함께 변화해 간다”고 답했다.
그의 작품은 63빌딩 로비에서도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불꽃축제 데이터, 한국음악 데이터 등 189만 건을 AI가 분석·재해석한 ‘희로애락’이다. 그러나 ‘비지도’나 ‘희로애락’ ‘기계 환각’ 모두 겉보기엔 비슷하다. 이에 대해 아나돌은 “미술사를 보면 모네도, 반 고흐도 고유의 스타일이 있다. 나는 데이터라는 마르지 않는 물감으로 작업한다”고 말했다.
합성피혁 제조사인 백산에서 운영하는 푸투라 서울은 다음달 5일 개관한다. 개관전인 아나돌의 전시는 이날부터 12월 8일까지 계속된다. 입장료 성인 2만2000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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