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드리운 그림자···생명 건지려 발 벗고 나선 것은 이것

최기영 2024. 8. 2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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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세계의 심장, 위기의 생명들
24시간 비대면 상담 구축···4600여 동료 지원가 마음 돌봄 나서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X국민일보 자살 예방 캠페인]
워크 투 세이프 라이프(Walk to Safe Lives)
미국 뉴욕을 대표하는 다리 가운데 하나인 브루클린 브리지 초입. 다리 난간 기둥에 자살 위기 상담 전화 번호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불안 또는 우울 증상을 겪는 미국인은 3배 이상 늘어 현재 3명 중 1명이 우울증을 안고 살고 있다.

허드슨 강을 가로지르며 미국 뉴욕시 맨해튼과 뉴저지주 포트리(Fort Lee)를 연결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는 세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교량 중 하나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로 꼽힌다. 동시에 자랑스럽지 않은 수식어도 따른다. 자살 시도자들이 많이 찾는 ‘자살 대교’다. 같은 이유로 아픔을 안고 있는 ‘뉴욕의 마포대교’인 셈이다.

세계 경제 심장의 그림자

조지 워싱턴 브리지 입구 모습. 3미터가 훌쩍 넘어 보이는 철조망이 자살 시도를 방지하도록 보행로 안쪽으로 휜 채 설치돼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오후 찾은 이곳에서 만난 쳇포드 험프리(48)씨는 “지난달 중순, 퇴근길이 평소보다 2배 이상 걸렸는데 알고 보니 자살 시도자를 구조하느라 교통정체가 생겼던 것”이라며 “조지 워싱턴 브리지는 멋지면서도 슬픈 다리”라고 했다. 걸음을 옮겨 다리 입구로 향하자 3m가 훌쩍 넘어 보이는 철조망이 보행로 안쪽으로 구부러진 채 설치돼 있었다. 자살 시도를 방지하도록 한 장치였다.

이튿날, 조지 워싱턴 브리지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다리인 브루클린 브리지를 찾았다. 초입에 설치된 철제 팻말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았다. 팻말은 ‘곤경에 처해 있나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란 문구와 함께 상담 전화번호를 안내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 ‘자살 명소’란 오명을 쓴 곳은 세계 경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맨해튼에 있다. 세계적 건축가 토머스 헤드윅이 45m 높이의 벌집 모양으로 디자인 해 ‘뉴욕의 에펠탑’이란 애칭을 얻은 베슬(Vessel·사진)이다. 하지만 2019년 3월 개장 직후 2년여 만에 4명의 투신 자살자가 발생하면서 2021년 8월부터 폐쇄됐다.

뉴욕 브롱스 레바논병원의 심리 상담가 이수일 박사는 이날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상 총기 사용, 질식사, 약물 음독 등에 비해 투신 자살률은 높지 않지만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상징성과 사회적 영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강조했다.

그래픽=강소연


뉴욕주의 10만명당 자살률은 2000년 5.59명이었던 것에서 2010년대 들어 8.3명 수준으로 급증한데 이어 코로나19 팬데믹 직후엔 8.5명까지 치솟았다. 미국 건강통계전국센터(NCHS)에 따르면 팬데믹이 미국인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지 드러난다.

2019년 전국건강면접조사 당시 불안 또는 우울 장애 증상이 있었던 성인은 10.8% 수준이었지만 이듬해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우울 증상을 겪는 이들이 3배 이상(35.9%) 치솟았고 이후 줄곧 32~39%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신 건강은 시민의 기본권
날로 심각해지는 자살 문제와 정신 건강 회복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뉴욕주는 정신건강 돌봄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뉴욕주의 정신 건강 사업을 주관하는 정신보건국 예산 추이만 보더라도 그 적극성을 확인할 수 있다.

회계연도 상(4월 1일~이듬 해 3월 31일) 2021년 44억 7000만 달러, 2022년 44억 90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예산은 2023년엔 전년 대비 16.1% 늘어 52억 1000만 달러로 늘었다. 올해는 무려 22.1% 증액한 63억 6000만 달러로 책정됐다. 한화로 1조 5000억원을 추가 투입해 이번 회기에만 총액 8조 3000억원이 정신 건강 안전망 구축에 쓰이는 셈이다.

손해인 뉴욕시 아동정신병원 임상사회복지사는 “뉴욕 주의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정신 건강 정책의 핵심은 정신건강서비스 공급 확대, 전문인력 확보, 연속적 정신건강 돌봄시스템 구축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통해 정신 건강이 신체적 건강과 동등하게 중요하며 시민의 기본권으로서 정신 건강 서비스를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책목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양한 접촉점이 생명안전망
정신건강, 상담 전문가들은 주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은 규모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국 사회와 절대적 수치로 비교할 순 없다고 본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 집중적으로 예산이 집행되는지 주목하면 바람직한 방향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 수조원을 투입해 정신질환자의 거주 공간을 마련하거나 정신응급의료센터를 신설하는 건 어렵더라도 24시간 가동되는 비대면 상담 시스템 구축 등 일상 속 접촉점을 늘리는 시도를 한국 사회에 접목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 어디에서나 세 자리 전화번호 ‘988’을 통해 전화와 문자, 온라인으로 위기 상담을 제공하는 ‘988 핫라인 서비스’(사진)는 뉴욕주의 정신 건강 정책 과제 중 두 번째로 많은 예산이 배정돼 있다. 기존에 전화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던 ‘전국 자살 예방 생명의 전화’의 경우 열 자리(1-800-273-8255) 전화번호로 연결해야 해 인식률이 떨어졌다. 응급 상황에 대응하는 ‘911’은 정신적 위기 상황의 상담 창구로 활용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손 복지사는 “2022년 7월 개통된 988은 새로운 상담 전화번호를 추가한 것 이상으로, 정신건강 위기 대응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자살예방 상담번호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19’, 청소년 상담전화 ‘1388’ 등 과거 8개로 분산 운영되고 있던 자살예방 상담 서비스를 통합해 지난 1월부터 ‘109’로 운영하고 있다. ‘한 명의 생명도(1), 자살 제로(0), 구하자(9)’라는 의미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정신적 위기를 겪는 이들에게 전화, 문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다양한 접근 창구를 마련하는 것은 일상에서 생명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며 “다만 한국의 경우 현재 100명 수준인 상담원 수를 증원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게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공감지수’ 높은 조력자 늘려야

뉴욕주 건강보건국 홈페이지.


정신 건강 서비스 확대를 위한 전문 인력의 지속적 공급도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 상담 전문 간호사, 임상 심리사 등 전문 인력을 단기에 집중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뉴욕주의 경우 효과성이 검증된 동료 지원가(peer specialist)를 필수 인력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정신보건국을 중심으로 동료 지원가 인증제도, 체계적 교육 양성 과정인 동료 서비스 학교(4~8주 과정) 운영해 현재 4600여명의 동료 지원가가 활동 중이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준전문가의 활동이 시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과 ‘준전문가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견 충돌도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손 복지사는 “뉴욕에선 2000년 중반부터 겪어왔던 시행착오이고 이를 통해 보완과 발전을 거듭해 왔다”며 “전문 학위, 오랜 수련 과정과 임상 경험을 지닌 전문가 입장에서 전문성을 우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이 진정한 조력자’라는 생각으로 기회를 주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박사는 “현재 활동 중인 동료 지원가들은 자살 또는 극심한 우울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주변의 이웃을 돕기 원하는 공감 지수가 높은 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지역 내 목회자와 성도들을 비롯한 종교인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사회적 안전망을 촘촘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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