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공익법인]유럽, 재단 통해 경영권 승계·그룹 지배
공익법인 통해 그룹 지배력 확보
사회공헌활동에 매년 2000억원 지출
유럽은 공익법인에 주식을 출연할 때 상속·증여세 면세에 관대하다. 그래서 출연받은 주식을 통해 재단이 기업을 지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독일, 덴마크 등 주요국에서 경영권 승계와 같은 사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공익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다. 유럽에서는 공익법인이 기업 지배력을 갖는 것에 대해 부당한 사익 편취라는 시각이 뚜렷하지 않아서 가능한 지배구조다.
독일의 로베르트 보쉬재단(이하 ‘보쉬 재단’)은 세금 혜택을 받으면서 주식을 출연받은 뒤, 계열 회사를 지배하는 안정적인 승계구조를 만들고 사회공헌활동에도 힘써온 대표적 사례다. 독일은 공익법인에 대해 증여세를 비과세할 뿐 아니라 상속 재산에 대한 비과세도 적용하고 있다. 피상속인이 공익법인과 자선법인, 교회법인 등에 증여한 재산에 대해서는 비과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쉬 재단은 자동차 부품 업계 세계 매출 1위인 보쉬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보쉬 그룹의 모회사인 보쉬 유한회사는 비상장사인데, 이 회사 지분의 92%를 보쉬 재단이 보유하고 이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구조다.
그렇다고 보쉬 재단이 그룹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보쉬 재단은 그룹에 대한 ‘의결권’은 전혀 보유하지 않은 독특한 구조를 자체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영은 하되, 회사의 독립성은 보장할 방안을 고민했고, 결국 보쉬 재단이 보유한 지분의 의결권 전부와 보쉬 후손 등이 보유한 지분 일부의 의결권을 보쉬 신탁에 위임한 것이다.
보쉬 재단 막대한 배당금 → 사회공헌활동에 매년 2219억원 쓴다
때문에 보쉬 재단은 보쉬 유한회사로부터 배당을 받을 권리는 갖고 있지만, 경영상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은 없다. 거꾸로 공익법인이 기업 경영에 관여하지 못하듯 보쉬 그룹의 계열사 역시 공익법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다.
보쉬 재단은 배당금을 통해 교육, 연구, 의료 등 다양한 자선사업에 쓰일 재원을 마련한다. 매년 그룹 순이익의 약 5~6%(약 1억4900만유로, 한화 약 2219억원)를 배당으로 받는다. ‘보쉬 헬스 캠퍼스’를 중심으로 환자 치료, 생물의학 연구, 의료 서비스 개선 등에 지원하고, 매년 우수학교를 선정해 독일 학교 상을 시상(상금 10만유로)한다.
전 세계 맥주 판매 6위 기업 칼스버그도 공익법인이 지배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의 칼스버그 재단도 세금 혜택을 받으면서 주식을 출연한 뒤 기업을 지배하면서 사회공헌활동에 힘쓰는 대표적인 사례다. 덴마크 역시 공익법인에 기부하는 주식의 면세 범위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 칼스버그는 전 세계 맥주 판매량 6위 기업인데, 칼스버그 그룹 공익법인인 칼스버그 재단이 지분 29%를 소유하고 있다. 이어 칼스버그는 맥주를 실제 생산하는 칼스버그 양조 주식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칼스버그 재단은 보쉬 재단과 달리 칼스버그에 대해 차등의결권(77%)까지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룹 전략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룹 의결권까지 쥔 칼스버그 재단…매년 2192억원 배당금 받는다
칼스버그 재단 또한 보쉬 재단처럼 그룹의 배당금 재원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한다. 칼스버그 재단은 2023년 기준 한 해에 11억 크로네(한화 약 2192억원)를 배당금으로 분배받았는데, 이 재원들은 또 다른 계열사 공익재단인 칼스버그 연구소(8%)나 투보그 재단(13%) 등에 배분하고 나머지 수익은 기초 연구 지원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지출하고 있다.
안정적 재원을 바탕으로 칼스버그재단은 다양한 분야에 후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칼스버그는 기금의 사용처를 A, B, C, D 등으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재원을 분배한다. 최고 품질의 맥주를 개발, 전 세계적인 양조 모델을 제공하기 위한 연구소 보조금 지원(A 부문), 양자역학 연구 등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기초연구 지원(B 부문), 국립역사 박물관을 유지하거나 개발해 역사의 유산을 간직하기 위한 후원(C 부문), 노동시장이나 민주주의 등 분야에서 활동하는 청년 시민 단체 지원(D 부문)으로 나뉜다.
특히 칼스버그재단이 기초과학 분야에 기여한 성과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1922년 양자역학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들이 활동한 ‘코펜하겐대학 이론 물리연구소’는 칼스버그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운영되어 왔다. 이 외에도 화학이나 미생물학, 유전공학 등을 포함한 주요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수십명을 후원했다.
문화예술 분야 지원도 눈에 띈다. 칼스버그 그룹의 창립자인 제이콥 제이콥슨의 아들인 칼 제이콥슨은 ‘뉴 칼스버그 재단’을 운영하면서 재단을 통해 박물관에 대한 예술 작품 기부 등 연구 분야를 지원했다. 한편 칼 제이콥슨은 고대 미술품과 자신의 소장품을 합쳐서 ‘칼스버그 글립토테크 미술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해당 미술관에는 반 고흐, 고갱, 로댕, 모네, 세잔 등 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덴마크 예술을 아카이브 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세종=이은주 기자 golde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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