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꺾인 공익법인]과학강국 스웨덴을 만든 발렌베리 가문의 '비결'

나주석 2024. 8. 2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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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베리 가문, 공익법인 만들어 사회적 후원
기업의 배당금→과학·교육 등 투자 구조
6세대 경영승계 진행 중

스웨덴의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은 지난해 27억크로나(약 3500억원)를 스웨덴 내 기초과학 연구와 교육 후원에 사용했다. 지난해에 특별히 많이 후원한 건 아니다. 최근 5년간 사회공헌 등으로 후원한 규모가 114억크로나에 이를 정도로 꾸준하다. 공익재단이 처음 출범한 1917년 이래로 440억크로나를 후원했다. 100년이 넘게 이어져 온 후원의 지향점은 스웨덴 국가공동체를 위해 ‘이로운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16개 재단 중 첫 번째 재단 창립 100주년 행사에서 재단 이사장인 피터 발렌베리 주니어는 재단의 지향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재단은 기초과학과 교육 등에 관하여 오랜 스웨덴어인 ‘랑스강넬릭트(landsgagneligt·스웨덴에 이로운)’라는 말처럼 스웨덴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해왔다."

‘랑스강넬릭트’라는 단어는 재단의 정관 등에 담겨 있는데, 재단은 이 모호한 단어의 의미를 '스웨덴을 위한 일에 돈을 쓰라는 것'으로 정의하고 그에 맞춰 집행하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출연해 만든 재단은 모두 16개다. 이들 재단은 가문의 후계자들이 대를 거쳐 이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제일 먼저 세워졌고 자산 규모도 가장 큰 크누트-알리스발렌베리(KAW) 재단의 경우 기초과학 투자 규모가 유럽에서 2번째로 많다. 이 재단들은 잠재성이 높은 연구 사업을 후원하거나, 의학, 수학 등의 분야에 지원을 해왔다.

가령 모든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수학 관련 프로젝트에 재단은 2014년부터 2030년까지를 기한으로 6억5000만크로나의 후원 예산을 책정했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152명의 학자가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는 해외 수학 관련 권위자들을 스웨덴 내 대학에 방문 교수로 데려오거나, 스웨덴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해외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들이 포함된다.

또 다른 공익재단인 마리안-마르쿠스 발렌베리 재단은 사회과학과 임상 의학 등에, 그 다음 규모인 마르쿠스-아말리아 발렌베리 재단은 인문학 등에 후원한다. 이들 재단은 후원을 받은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내야 한다는 의무 등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학계에서 ‘바보같은 아이디어’ 취급을 받더라도 타당성과 연구 필요성 등이 인정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이유다. 발렌베리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은 인구 1000만명 규모의 스웨덴을 유럽에서 손꼽히는 연구개발(R&D) 강국으로 만들었다.

발렌베리 가문은 어떻게 천문학적인 후원을 할 수 있는가

발렌베리 가문은 앙드레 오스카르 발렌베리(1816~1886)가 1857년 스톡홀름 개인은행을 설립하며 경제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당시에는 상업은행이 기업 구조조정을 진행할 정도로 금산분리에 대한 개념이 옅었지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진 뒤 발렌베리 가문은 투자회사를 통해 기업들에 투자했다. 앙드레의 맏아들인 크누트 아가톤 발렌베리와 동생 마르쿠스 발렌베리 시니어가 가문을 이었는데, 특히 사업 수완이 좋았던 크누트는 스웨덴의 손꼽히는 부자가 됐다. 그는 1917년 본인과 아내의 이름을 따 KAW 재단을 설립했고, 이후 발렌베리 가문 구성원들도 공익재단을 세워 재산을 넘겼다. 발렌베리 가문이 각각 세웠던 공익재단들은 발렌베리 일가가 구축한 기업집단의 핵심축인 스톡홀름 개인은행과 투자회사인 인베스토르에 투자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KAW 재단은 약 2000만크로나(현재가치로 7억4600만크로나)로 출범했는데, 현재 자산규모는 2160억크로나에 이른다. KAW 재단을 만들 당시 두 사람은 정관을 통해 재단이 투자수익금을 과학적 연구 외에도 스웨덴의 무역과 산림업, 산업, 기타 상업 활동을 증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후 재단은 '스웨덴의 이익'이라는 대원칙 아래 후원사업을 벌여왔다. 현재 발렌베리의 후손들은 재단 이사회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수행하며, 발렌베리 가문이 구축한 기업제국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발렌베리 6세대 구성원들에 대한 승계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재단 측은 "6세대에 해당하는 30여명이 가문의 사회적 공헌과 가치, 역사 등을 배우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현재 발렌베리 가문이 전부 또는 일부 지분을 보유한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연간 매출은 1600억달러(21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발렌베리 일가는 이 방대한 기업군과 관련해 비상장상사는 발렌베리 인베스트먼트, 상장사는 인베스토르와 같은 투자회사를 통해 피라미드 방식으로 그룹을 지배한다. 재단은 투자회사가 보유 중인 기업의 배당 등으로 벌어들인 수익금 가운데 80% 이상을 공익활동에 쓰고 있다. 이 때문에 발렌베리 가문의 재단은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 가문의 구성원들은 억만장자가 없다. 스웨덴 100대 부자 등의 명단에 발렌베리 일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발렌베리 일가는 왜 이와 같은 지배구조를 채택했을까

KAW 재단을 만든 크누트는 당대 스웨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인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웨덴 외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외무부 장관직을 마치고 몸져누웠던 그는 과거에 생각만 했던 재단 설립을 서두르기로 했다. 자녀가 없었던 터라 결심이 쉬웠다. 공인이기도 했던 그는 각종 기부 요청을 숱하게 받았는데, 재단을 구성하면 이런 기부 요청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재단을 세운 뒤 그는 재단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열정을 보였다.

발렌베리 가문이 최대주주인 기업들 [출처 : 발렘베리 재단]

이 같은 선의 외에 실용적 의도도 발렌베리 가문의 재단 설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신정완 경북대 교수는 "발렌베리 일가가 공익재단을 많이 설립한 것은 사회공헌을 위한 가문의 이미지 제고 목적 외에도 공익재단이 기업 주식 소유를 통해 얻은 이익은 조세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막대한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서종희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 등 스웨덴 기업재단법제의 고찰'이라는 글을 통해 "자선 목적을 가진 스웨덴 재단은 자본소득과 재산 상속·증여 등에 대한 세금이 면제되며, 소유권을 재단에 이전해 여러 상속인이 기업자산을 분할하는 것을 피해 하나의 의결권 구조에서 기업자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 스웨덴은 최고 한계 상속세율이 60%에 달했다. 다만 스웨덴은 ▲공익을 행하고 ▲재단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이 90~95%에 이르며 ▲순수입의 80%를 차지하는 경우 등에 한해 상속세 면세 혜택을 줬다.

다만 1980년대 이후 스웨덴에서도 관련 제도가 바뀌며 기업들의 공익법인 세우기가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배주주에 대한 재산세 및 상속세 폐지 등으로 공익재단 설립 유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재단은 어떤 기업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나

여러 개의 공익재단을 하나로 통칭해 부르는 발렌베리 재단은 크게 투자회사인 인베스토르와 발렌베리 인베스트먼트를 두 축으로 기업을 지배한다.

KAW 재단을 포함한 3개 재단이 50%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베스토르는 자산 규모가 9693억크로나에 이르며 사브나 에릭손, 아스트라제네카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기업에 대한 투자로 발생하는 수익은 발렌베리 가문의 여러 재단 등 주주들에 배당금 형식으로 돌아가는데, 이 돈이 발렌베리 가문의 사회공헌 자금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들은 순환출자구조가 아니라 인베스토르와 같은 투자회사를 통해 피라미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발렌베리는 차등의결권을 통해 실제 보유 지분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통해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다.

인베스토르 외에도 발렌베리 가문이 100% 보유한 발렌베리 인베스트먼트는 비상장기업 투자회사인 FAM과 기술 관련 벤처기업, 사모펀드(PEF) 등에 투자하고 있다. 2023년 연말 기준으로 FAM은 630억크로나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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