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땅 두 배 늘어난 '이 나라', 최강대국 된 사연
[이준목 기자]
'미국-스페인 전쟁(American-Spanish War, 1898)'은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을 놓고 유럽의 전통 강국 스페인과 떠오르는 신흥강자 미국이 맞붙었던 전쟁이다. 스페인은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대부분 상실하고 몰락했다. 반면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또한 미국은 이 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주의 팽창 정책을 통하여 본격적인 '제국주의(帝國主義 / Imperialism) 시대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참혹한 희생이 뒤따라야 했는지, 스페인과의 전쟁은 미국이 걸어온 잔인한'피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2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166회에서는 '스페인을 제물삼아 최강제국이 된 미국'편을 통해 미국-스페인 전쟁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조명했다.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
당시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정복과 약탈에 혈안이 된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유래한 단어가 '엘 도라도(El Dorado, 황금의 도시)'였다. 스페인에게 아메리카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만 스페인은 본토의 몇 배가 넘는 거대한 식민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지금도 남미와 북중미 일대에서는 언어와 문화 등 스페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유다.
이러한 스페인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은 바로 미국의 탄생이었다. 178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립한 신생 국가 미국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세기 유럽의 국제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진 데 이어, 나폴레옹 제국이 등장하면서 유럽 곳곳은 전쟁에 휩싸였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압박을 받아 아메리카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빼앗겼다. 그런데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현 대한민국 영토의 20배에 이르는 루이지애나 영토를 불과 단돈 1500만달러(현 5800억 원)에 미국에 양도하게 된다. 이로서 미국의 국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이어 1819년에는 스페인이 자국의 영역이었던 플로리다 일대를 미국에 약 2000억 원에 매각한다. 미국에 인접했던 지리적 특성상, 스페인 인구보다 미국 인구가 더 늘어나면서 통치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
다만 미국은 영토를 확장한 이후에도 기존에 남아있던 스페인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산타모니카, 콜롬비아, 로데오 등 미국 곳곳의 지명인 문화는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
1823년 미국의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는 이른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발표하며 외교 노선을 정립한다. 이는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끼리, 유럽은 유럽끼리'는 방침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유럽의 간섭이나 재식민지화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미국도 유럽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미국이 북미를 장악한 이후, 중남미 일대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연이어 독립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호시탐탐 재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미국으로서는 먼로 독트린을 통해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하여 유럽의 진출을 막으려는 '지역패권주의'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키려는 스페인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갈등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곳이 쿠바였다. 16세기에 쿠바섬은 스페인에게 정복당했고 이후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 지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되어 왔다. 당시 스페인은 쿠바를 단순한 식민지를 넘어서 오랫동안 공을 들인 자신들의 고유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18세기 들어 스페인의 국력이 약화되고 이미 많은 식민지를 잃은 상황에서도 쿠바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쿠바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던 미국은 스페인에 영토 매각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쿠바 탄압
스페인은 무려 10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쿠바인을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수용소에 감금하고 잔혹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당시 수용소에서 희생된 쿠바인의 숫자는 17만에서 40만에 이르며 훗날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모태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로 끔찍했던 인종학살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스페인의 쿠바 대학살은, 미국이 쿠바에 개입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됐다. 1898년 2월 15일에는, 쿠바의 하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폭발해 약 260여명의 미국 병사가 사망하는 '메인호 참사'가 벌어진다. 당시 충격적인 사고에 미국 황색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더해지며 그 배후에 스페인이 있다는 가짜뉴스가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러한 의혹을 극구 부인했다. 사실 스페인은 당시 미국과 굳이 전쟁을 일으킬만한 명분도 여력도 부족했다. 일각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는 음모론도 있었지만, 이 역시 비싼 주력 전함과 수백 명의 병사를 희생시켜 가면서 무리수를 저질렀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1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수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메인호 참사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이야 어찌 됐든 당시 미국으로서는 메인호 사건을 기점으로 '스페인을 응징하고 쿠바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급격히 확산된다. 그해 4월 23일, 미국은 결국 스페인에 선전포고 하면서 전쟁에 돌입한다.
엉뚱하게도 양측의 전쟁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쿠바도, 미국이나 스페인 본토도 아닌 태평양에 위치한 필리핀이었다. 사실 미국은 아메리카만이 아니라 태평양을 통하여 아시아 진출도 노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스페인의 영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필리핀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 이는 미국이 스스로 선언한 먼로 독트린과도 정면으로 모순되는 행보이자 또 다른 팽창주의 정책이었기에, 제국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위선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해군차관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훗날의 미국 26대 대통령)은 그해 5월 1일, 상부의 지시도 없이 독단적으로 필리핀 마닐라만 공격을 명령했다. 마닐라 해전은 미국의 일방적인 완승으로 끝났고 미국 함대의 사상자는 7명에 불과했던 반면, 스페인은 사망자만 169명, 사상자는 300여 명이 넘고 함대가 궤멸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한때 무적함대를 자랑했던 스페인은 국력이 쇠퇴한 데다 세계 각지에 해군력이 분산되면서 전쟁준비에 차질을 빚으며 전쟁수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반면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을 대비해 약점으로 꼽히던 해군력을 크게 증강해 놓은 상태였다. 이어 6월에는 무혈입성으로 괌을 정복하여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
사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시작 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미국은 신생 국가였지만 산업혁명의 빠른 발전으로 이미 유럽 열강을 뛰어넘는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전쟁 경험도 풍부했다. 반면 스페인은 이미 과거의 막강한 군사력과 식민지를 대거 상실하며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이 기울어가는 시점이었고, 쿠바 대학살과 미국의 언론플레이로 국제사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였다.
결국 1898년 12월 10일에서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미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스페인로부터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필리핀을 획득하게 된다. 스페인은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며 열강의 지위를 잃고 몰락하게 된다. 이는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앞서서 세계사에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전성시대)'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패권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미국은 '플래트 수정안'을 통하여 쿠바를 독립시켜 주는 조건으로, 유사시 미국의 개입과 군사기지의 설치를 보장하는 조약을 맺는다. 신생독립국으로서 아직 독자적 생존능력이 부족한 쿠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고, 카리브해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이 당시 쿠바 남부에 설치된 것이 관타나모 해군 기지다.
미국의 다음 과제는 필리핀에 대한 결정이었다. 미국 내부에서 필리핀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갈렸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제국주의 vs. 반제국주의 노선 경쟁으로 불린다.
당시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필리핀을 독립시킨다면 오히려 스페인이나 다른 유럽 열강들이 차지할 수 있고, 필리핀인들에게는 자치를 할 만한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식민지화의 이유로 꼽혔다. 하지만 이는 미국과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독립을 갈망하던 필리핀인들의 뒤통수를 친 순간이기도 했다.
미국- 스페인 전쟁 당시 미국에 적극 협력했던 필리핀 독립군은, 미국의 배신에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은 이러한 필리핀 독립군의 저항을 잔혹하게 무력 진압했다. 필리핀 독립군은 1901년 발랑기가 전투에서 기습작전에서 미군을 궤멸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망신당한 데 분노한 미군은 보복으로 무려 수천 명에 이르는 발랑기가의 민간인들을 대거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미군이 운영한 민간인 수용소들에서 많은 필리핀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증거도 나왔다. 미국은 결국 1902년 7월 4일, 전쟁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며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신생 국가였던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기점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 강자를 벗어나, 세계 무대에서 화려한 데뷔식을 치르며 명실상부한 거대 식민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아우르는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미국은 1907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28척의 '백색함대'가 세계일주를 하는 깜짝 이벤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미국의 달라진 위상과 강력한 군사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국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신성하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는 평생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이다.
미국은 건국 이후부터 지속적인 정복과 전쟁, 영토 확장을 통하여 세력을 키웠고, 오늘날 세계를 대표하는 초강대국의 반열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잔혹한 패권주의과 제국주의로 인하여 수많은 희생을 남겼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미국의 어두운 업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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