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성범죄에 "남자 욕하지 마"... 5년 전 반복될까 두렵다
[이진민 기자]
개강을 앞둔 대학생 A씨는 학교에 가기 두렵다. 텔레그램 성범죄 명단에서 자신이 속한 학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A씨는 "에브리타임(국내 최대 대학생활 플랫폼)에 들어가니 여성 학우들이 조심하라며 실제 만들어진 방을 캡처해서 올렸다"며 "도대체 누가 저 방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무섭다. 학과 학생이 그런 건지, 교수가 그런 건지 모르지 않느냐. 그들과 함께 학교에 있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를 더욱 당혹하게 한 건 에브리타임 안에서의 반응이다. A씨는 "(남학생들이 에브리타임에) 무의미한 여성 혐오 게시글을 올리며 (딥페이크와 관련한) 여론을 바꾸려고 한다"며 "다른 학교 게시글에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글이 올라왔다. 그들은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격분했다.
대학생 B씨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에브리타임에 텔레그램 성범죄 관련해서 분노하는 게시글이 하나 올라오니까 '페미'들이 점령했다는 글이 뒤이어 올라왔다"며 "현재 군대에서 겪는 부당함을 토로하거나 남성을 욕하지 말라는 글이 인기 게시글을 차지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지난 26일 <한겨레>는 참여 인원만 22만여 명에 이르는 텔레그램 방에서 딥페이크 불법합성물 제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성의 사진을 넣으면 이를 합성해 불법합성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 탑재된 대화방에서는 "지금 바로 좋아하는 여성의 사진을 보내라"는 입장 문구를 보내며 참여를 유도했다. 처음에는 합성물 제작이 무료지만, 세 번째부터 유료로 전환되는 수익 구조까지 갖추고 있었다.
또 텔레그램 상에서 누나, 여동생, 엄마 등 가족의 모습을 촬영해 공유하는 이른바 '누나방', '엄마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SNS에서는 자신이 겪은 친족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친족 미투'가 나오고 있다. 반복되는 텔레그램 성범죄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N번방 사건'을 언급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아 현재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화면 갈무리 |
ⓒ NETFLIX |
과연 그들은 어떻게 'N번방'이란 거대한 사이버 성 착취물 제작소를 세웠을까. 지난 2022년 공개된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취재진과 '불꽃' 추적단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한다. 그들은 "피팅 모델을 모집한다"는 광고 글을 올려 피해자들을 유인, 고용 관계처럼 대화하며 개인정보를 습득했다. 이후 그들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고, 주변 지인이나 가족에게 이 사실을 퍼뜨리겠다고 재차 협박하며 폭력의 굴레에 가뒀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철저히 괴롭혔다. 실제 그들이 사는 집에 찾아가 인증 사진을 찍거나 그들이 보낸 성 착취물에 '박사', '박사 노예' 등 운영자의 이름을 넣은 워터마크(저작권 정보가 담긴 코드)를 삽입했다. 또한 자신들을 추적하는 언론사를 향해 "더 추적하면 '000(언론사 이름)' 피해자를 만들겠다", "방송 나가면 피해자를 투신자살시키겠다"고 협박하거나 이들의 신상을 유포했다.
여러 정보를 추적한 끝에 마침내 주동자들이 잡혔고 N번방의 실상이 속속히 들추어졌다. 국민들은 주동자는 물론, '26만 명'이란 거대한 숫자로 자리 잡은 가담자들이 밝혀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조주빈, 문형욱, 강훈 등 운영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 혐의가 특정된 일반 가담자는 378명으로 실형이 선고된 건 12.4%에 불과, 집행유예는 261명이었다.
B씨는 최근 텔레그램 방 딥페이크 사건을 보며 과거 'N번방'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N번방 사건 때 '26만'이란 숫자를 보고 놀랐는데 처벌받은 사람도 거의 없고, 다 풀려났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웠다"면서 이어 "그때 잡히지 않은 '26만'이란 숫자가 결국 텔레그램 가담자 22만 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있는 택시 수(약 25만 대)랑 범죄자 수랑 같다고 하더라"며 미약한 처벌을 비판했다.
N번방의 미약한 처벌이 '텔레그램 성범죄'로 이어졌다고 지적한 이들은 여럿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6일 성명서를 통해 "여성들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 뉴스를 보면서 붕괴된 사회에 절망하고 있다"며 "여성에 대한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도 예방하지도 않는 사회에서 말 그대로 국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당 사안에 대한 범국가적 대응을 요구했다.
▲ '텔레그램 성범죄' 관련 게시글이 에브리타임에 올라오자 모 대학의 반응 |
ⓒ 에브리타임 |
실제로 보안성이 높다고 알려진 텔레그램은 비밀 대화가 가능해 러시아, 이란, 홍콩 등 정부 탄압에 맞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소통 도구로 활용된 바 있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위한 소통 창구이기도 하다. ISIS는 테러리스트를 모집하는 데 텔레그램을 이용했으며 미국에서는 지난 2021년 1월 극우 세력들이 이를 통해 소통하며 의회 의사당에 난입했고 영국에서는 지난 7월 반이민주의 세력이 가짜뉴스를 유포하며 폭력 시위를 유도했다.
국내에서는 2021년 12월 성 착취물 유포를 방치한 플랫폼 사업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됐으나 정작 유통 통로였던 텔레그램은 '사적 대화방'이란 이유로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편, '텔레그램 성범죄'에 대한 저항은 거세지고 있다. SNS상에서 지역별, 학교별 텔레그램 방의 현황을 공유하는 '가해자 명단'과 참여자들의 신상을 밝히는 폭로 글이 이어지고 있다. 상당수의 여성은 "국가적 차원에서 발생한 범죄 사건을 사적 고발과 제재로 해결할 수 없기에 '무력감을 느낀다'"며 "끊임없이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에 국가가 손을 놓고 있다"고 호소했다.
N번방의 미약한 처벌이 또 다른 범죄를 만들었음을 인정하고, 디지털 성범죄에 단호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요구가 엄격한 법적 처리, 재발 방지 대책 등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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