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흥미롭고 독특한 서울의 '언어 경관'

2024. 8. 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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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연 경관 외 도시 이루는
언어 경관과 언어적 소리 경관
서울의 상업 지역 걷다보면
다양한 언어 간판 볼 수 있어
성장 지역·연령대·상황 따라
한국어도 다양하게 변화

세계 유명 도시들마다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 파리 에펠탑, 로마 콜로세움, 뉴욕 자유여신상, 베이징 톈안먼 같은 것들이다. 서울은 어떤 게 있을까. 특정 건축물보다는 북촌 가회동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남산, 한옥 기와의 물결이 유명해 보인다. 도시계획 용어로 표현하자면 한옥의 기와 물결과 남산을 연결하는 개념은 경관이다. 한옥처럼 역사성 짙은 건축물 등은 역사적 경관으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곳은 자연적 경관으로 불리곤 한다. 역사와 자연 모두 가치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서울의 역사와 자연경관은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도시도 비슷한 방향의 정책을 실행한다.

도시를 이루는 경관에는 그러나 눈에 보이는 역사와 자연경관 말고도 흥미로운 지점이 또 있다. 바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관계된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과 ‘언어적 소리 경관’(linguistic soundscape)이다. 언어경관은 1990년대 말부터 도시 간판, 표지판 등을 포함하는 문자 연구를 시작으로, 오늘날에는 언어학의 하부 분야로 자리 잡을 만큼 성장한 분야이다. 언어에는 소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로 표현하는, 이른바 문어체만으로는 그 도시의 전체적인 언어경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최근 들어 도시에서 들리는 여러 소리는 선진적 연구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서울은 언어 경관과 언어적 소리 경관이 매우 독특하고 흥미진진한 도시다. 먼저 문자로 구성된 언어경관을 살펴보자. 서울 어느 상업 지역을 가더라도 복잡한 간판과 마주한다. 규칙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 가게와 업체 취향과 사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듯한 인상이 강하다. 언어적으로 보면 한국어와 영어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중국어와 일본어도 꽤 많고 때로는 베트남어나 유럽 여러 나라 언어로 된 간판도 종종 눈에 띈다. 명동, 이태원, 대림동, 동대문처럼 외국인이 많은 지역은 때로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많이 보이기도 한다.

서울의 상업지 거리 간판-인사동으로 쇼핑에 나선 시민들과 외국인들 주변으로 간판이 즐비하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문자와 언어의 차이다. 한글은 한국어를 위해 개발되긴 했지만 다른 언어를 한글로 쓸 수 있다. 반대로 알파벳은 한국어를 포함해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여러 언어권에서 사용한다. 한자의 경우는 또 다르다.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자 간판이 곧 중국어나 일본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서울 상업 지역은 마치 언어 게임장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한국어는 알파벳이나 한자로, 영어 또는 다른 언어는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거리를 조금만 걸어도 다양하고 독특한 간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알파벳, 숫자, 부호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혼합 형태 간판도 많다. 알파벳 ‘e’는 1990년대 이메일 확산으로 미래 첨단 기술 관련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영어 알파벳 발음이 한국어의 지시대명사 ‘이’와 같다 보니 ‘e편한세상’ ‘emart24’ 같은 ‘e’로 시작하는 간판이 많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영어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편의점 CU 로고 앞에 ‘nice to’를 놓으니 ‘만나서 반갑다’(nice to see you)의 뜻이 된다.

외국어와의 혼합 형태 간판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90년대 ‘글로벌화’ 유행, 인터넷 보급, 그리고 민주화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한편으로는 한글을 예쁘게 쓰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종로구는 알파벳 간판을 한글로 바꿔 쓰도록 유도했는데, 인사동이나 서촌 입구 스타벅스나 파리바게뜨 매장의 한글 간판은 그 결과물이다.

서울의 언어적 소리 경관은 문자가 다양한 길거리만큼 다양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측면이 많다. 한국은 이민자가 많지도 않고 이중언어 국가가 아니라서 들려오는 것은 당연히 주로 한국어다. 관광객이 많은 지역은 외국어가 자주 들리고 그중에 국제공통어 역할을 발휘하는 영어가 제일 많지만 영어 원어민보다 비원어민의 영어가 더 많다. 외국인들끼리 사용하는 언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붐비는 길과 골목길은 언어 칵테일의 생생한 현장이다.

외국어만 흥미로운 건 아니다. 서울에서는 다양한 한국어를 느끼곤 한다. 1960년대 이후 경제 성장률이 높아지면서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여러 지역의 사투리가 서울을 가득 채웠다. 서울말을 적극적으로 익히려는 이들도 많지만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 비교적 연령대가 높으면 강한 사투리를 쓰는데, 차츰 서울에서 태어난 이가 늘어나면서 서울 시내에서도 사투리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서 세대 간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사용한 단어 자체가 달라 요즘 서울말을 듣고 있으면 또 하나의 방언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적 소리 경관이 흥미로운 점은 말의 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작거나 크게 말한다. 서울은 이러한 말 크기의 폭이 넓은 편인데,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친밀감이다. 친한 사이끼리는 목소리가 크고 그렇지 않을수록 소리가 작아진다. 최근 몇 년 사이 점점 작게 말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술 한 잔을 마실 때면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목소리가 작아졌고 대중교통 이용 중에는 더 그렇다.

이러한 서울의 언어경관, 언어적 소리경관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민주화로 인한 사회의 다양성, 그리고 활발해진 국제 교류를 들 수 있다. 경제 급성장기 서울 시민 대부분은 농촌을 포함해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 태어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많아진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회가 항상 변하듯 언어도 항상 변한다. 한국의 경우 급속한 도시화가 끝났고 사회는 이전과 비교해 훨씬 더 부유하고 안정화되었다. 따라서 변화의 속도 역시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외국인을 향한 이민의 관문이 좀 더 넓어진다면 언어경관, 특히 언어적 소리경관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과연 그 관문이 지금보다 넓어질 것인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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