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 김밥을 어떻게 먹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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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영 기자]
저녁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침부터 매미가 맹렬히 울부짖었다. 끝을 향해 가는 여름의 마지막이 아쉬워 더욱 시끄러운지도 모르겠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는 환한 빛과 불청객의 소음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 침대 밖으로 나왔다.
김치냉장고에서 쌀 두 컵을 펐다. 쌀을 씻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첫물을 빠르게 따라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아 씻기를 여러 번, 바락바락 깨끗이 헹군 투명한 쌀을 압력솥에 안쳤다.
편리하지만 덩치가 커서 한 자리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전기를 많이 먹는 전기압력밥솥 대신 아담한 4인용 압력솥에 끼니마다 밥을 짓는다. 불에 올린 지 얼마 안 돼 칙칙 압력추가 도는 소리가 나면 알람인 양 식구들이 하나둘 일어난다.
별 반찬이 없어도 밥만 맛있으면 든든한 한 끼가 된다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그 의미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 금오이 김밥, 요즘 오이값으론 어림 없다. |
ⓒ 원미영 |
갓 지은 밥에 정성껏 밥상을 차리기도 하지만, 아침을 차리기 빠듯한 시간엔 부르르 끓인 누룽지에 신김치나 오징어젓갈을 곁들여 내기도 하고, 바나나와 구운 계란 한 개로 대신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아침을 꼭 먹어야 할까? 귀찮은데 그냥 굶자 하는 생각이 들 때 오래전 읽었던 스즈키 루리카의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속에 등장하는 한 문장을 떠올린다.
"슬플 때는 배가 고프면 더 슬퍼져. 괴로워지지. 그럴 때는 밥을 먹어.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 p.266
물론 지금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괴로운 것은 아니다. 언젠가 가족 누구라도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면 내가 차려준 밥 한 끼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공기가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에 온기로 닿길 바라며 오늘도 밥을 짓는다.
일찍 일어난 김에 김밥을 쌌다. 누가 소풍이라도 가냐고? 아니다. 순전히 내가 먹고 싶어서였다. 넉넉히 싸서 식구들 아침으로 먹고, 일터에 점심 도시락으로 싸가리라 맘먹었다. 마침, 친정에서 받아온 오이가 넘쳐나 오이를 갈라 씨를 빼고 20분 정도 소금에 살짝 절였다. 부모님의 텃밭 덕분에 금오이라고 불리는 오이를 듬뿍 넣어 사치스러운 김밥을 만들게 되었다.
금값이 된 오이
잦은 호우와 불볕더위로 상추며 오이와 같은 채소 가격이 폭등했다. 얼마 전 마트에서 상추를 사려다가 무시무시한 가격에 놀라 재빨리 제자리에 뒀다. 이가 없으면 잇몸을 살아야지. 상대적으로 가격 부담이 덜한 양배추를 구입해 채 썰어 먹고 있다.
▲ 친정 부모님께 받아온 모양이 제각각인 오이. 소금을 살짝 뿌려 절였다. |
ⓒ 원미영 |
값싸고 영양이 풍부한 제철 식재료로 밥상을 차리는 계절, 제철 음식을 즐기는 것도 앞으로 분에 넘치는 일상으로 기억될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이 맛을 이기겠나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양푼에 덜어 밑간했다. 한 김 식힌 후 펼쳐놓은 까만 김에 평평하게 밥알을 펼쳤다. 레시피에 적힌 모든 재료를 그대로 갖춰야 요리를 할 수 있었던 풋내기 주부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몇 개쯤 빠져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론 맛은 조금 덜할 수 있지만.
▲ 오이김밥, 얼마나 맛있게요! |
ⓒ 원미영 |
점심은 동료와 도시락으로 싸 온 김밥으로 해결했다. 오이 넣은 김밥이 오랜만이라며 집에서 싼 김밥은 언제나 진리라며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후식은 김밥에 대한 보답으로 바닐라 라테를 얻어 마셨다. 호사스러운 금오이 김밥과 달콤한 바닐라 라테 한 잔에 또 한 끼만큼 살아낼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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