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의 아픔을 '탁본'처럼 가져온 시들

윤성효 2024. 8. 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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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희 시인이 '2020년 진주가을문예(26회)'에서 받은 시당선작 "연어답다"에 대해, 심사했던 김언희, 김병호 시인은 "유희를 뛰어넘는 발랄한 언어감각과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치밀한 표현"이라며 "연어가게에서 펼쳐지는 시적 사유 또한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어 시적 울림이 작지 않았다"라고 했다.

황 시인이 "연어답다"를 포함해 그동안 생산했던 작품 가운데 50여편을 뽑아 모은 시집 <새들이 초록 귀를 달고> (시와반시 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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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희 시인 시집 <새들이 초록 귀를 달고> 펴내 ... 연작시 "탁본" 등 실려

[윤성효 기자]

 황명희 시인.
ⓒ 시와반시
황명희 시인이 '2020년 진주가을문예(26회)'에서 받은 시당선작 "연어답다"에 대해, 심사했던 김언희, 김병호 시인은 "유희를 뛰어넘는 발랄한 언어감각과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치밀한 표현"이라며 "연어가게에서 펼쳐지는 시적 사유 또한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어 시적 울림이 작지 않았다"라고 했다.

황 시인이 "연어답다"를 포함해 그동안 생산했던 작품 가운데 50여편을 뽑아 모은 시집 <새들이 초록 귀를 달고>(시와반시 간)를 펴냈다.

시집 2부에 실린 연작시 "탁본"에 먼저 눈이 간다. 아직도 그 아픔이 남아 있는 제주4·3항쟁을 다룬 시들이다. 1950년 4월 3일 제주에서 발발해,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4.·3항쟁이 '탁본'처럼 시로 그려져 있다.

"... 죽은 아이들의 영혼처럼 맑은 카메라의 눈이 폭낭 그늘을 들추자 뚝뚝 목이 꺾인 800명의 아이들이 저녁노을 속으로 새떼처럼 날아올랐다 / 탁본이란 위패 속 아이들을 불러내어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이는 일, 역사의 기록이란 죽은 아이들의 죽은 꿈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올려 폭낭의 숲을 울창하게 하는 일"(시 "탁본2-폭낭의 아이들" 부분).

사유진 감독이 4·3항쟁에서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다큐 영화 <폭낭의 아이들>(2022년 작)을 보고 표현한 시다. '죽은 아이들의 죽은 꿈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올'리고 싶은 시인의 간절함이 전해진다.

"... 잃어버린 이름의 기억만 서성거리는 검은 골목길을 버리고 한림읍 사촌 언니 동네를 찾았습니다 한경읍에서 한림읍까지 그 긴 신작로 어느 지점에 왈칵 쏟아지던 햇빛 같은 이름 진아영은 기억 속 낯선 할머니의 흑백 인생 한 도막이었습니다 떨어져 나간 턱의 상처를 무명천으로 싸매고 고향 떠난 진아영 할머니는 한평생을 무명천 할머니로 살았습니다(시 "탁본8-잃어버린 이름" 부분).

'무명천 할머니'는 4·3항쟁 당시 토벌대가 쏜 총탄에 맞아 턱이 사라진 채로 평생을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살았던 진아영(1914~2004년) 할머니를 부르는 말이다. 시인은 그 할머니를 '사촌 언니 동네'처럼 가깝게 떠올려 놓았다.

강현국 시인은 황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나는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를 떠올렸다. ... 황명희의 서사가 새겨진 '그 강의 연어 떼'에 기형도의 서사가 투사된 '황혼의 새들'이 얼비치기 때문이다. '새들의 초록 귀'는 아마도, '입 속의 검은 잎'을 살색한 오래된 미래의 풍경이겠다"라고 했다.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는 "일상과 역사, 그리고 기억의 시적 주름들"이란 해설에서 "황명희는 박제가 된, 굳어서 돌이 된 세계를 건드려 주름의 축제로 만든다. '시적인 것'의 촉수가 창문 없는 실체를 건드릴 때 일상과 역사의 주름들이 창밖으로 걸어 나온다"라고 했다.

"그의 시들은 화석화된 존재의 내밀한 사연을 액체화하여 흐르게 한다. 그는 현재를 호출하고 과거를 소환할 뿐 아니라 현재를 역사화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현재는 오래된 미래이다. 그의 시들은 기억과 오래된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슬픈 주름들이다"라고 덧붙였다.

황명희 시인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2020년 '진주가을문예'에서 시부문 당선했고 올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문학작품발간사업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시와반시> 편집장으로 있다.

연어답다

'연어답다는 연어의 거룩한 삶까지 포장해드립니다'라고 써 놓은 가게 문을 열자 연어들이 우르르 떼 지어 몰려왔다. 바다를 거슬러 오르던 한 생애를 누군가 경건하게 건져 올려 '연어답다'한 토막난 말로 쟁여 놓은 곳, 냉장실의 붉은 몸 토막에 일렁이는 물결들이 내 눈길을 끌어당긴다. 연어답다의 젊은 주인은 유난히 붉은 살을 집어 들더니 저울에 달아 투명한 랩으로 포장하기 시작한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헤엄치던 연어의 가파른 기억을 단단히 옭아매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는 투명한 랩으로 단단하게 초장되어 있던 연어를 끄집어내어 연어답다로 토막낸다. 연어답다 속에 얼룩져있던 연어답지 않다가 보인다. 연어답지 않다를 토막낸다. 연어답지 않다에 얼룩져 있는 연어답다가 보인다. 연어답다와 연어답지 않다 사이에 출몰하는 바닷물과 냇물들의 밑바닥을 들추어 본다. 연어답다와 연어답지 않다 사이 미끄러지는 몸부림을 꽉 움켜쥔 어머니의 쭈글한 손의 내력을 가늠해 보려는 듯이

'연어답다'는 바닷물과 냇물의 서로 다른 생각들이 엇갈려 새겨진 탄탄하고 붉은 욕망, 혹은 몸부림의 서사가 기록된 오래된 책일까. 혀끝에 살살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촉감과 가파른 침묵이 '연어답다'로 포장된 붉은 당신의 생애를 찾아 벅꽃 흐드러지지게 핀 산길을 걸어간다. 수천마리 연어 떼가 등 뒤에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벚꽃이 새떼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황명희 시인 시집 <새들이 초록 귀를 달고> 표지.
ⓒ 시와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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