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배터리 쇼크…벤츠답지 않은 벤츠 행보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 아파트에 주차된 전기차 화재 사고로 수입차 대표 주자 메르세데스-벤츠가 한국 시장에서 사상 최고 위기에 처했다. 불이 난 EQE 350+ 모델뿐 아니라 최상위 모델에도 중국 기업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악화 일로다. BMW와의 1위 경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최상위 모델에도 중국산 배터리 장착
지난 8월 1일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배터리 안전성 논란이 커지자 주요 완성차 업체는 곧장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했다. 8월 10일 현대차를 시작으로 12일에는 기아, BMW가 각 모델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를 밝혔다. 제조사를 공개하지 않고 버티던 벤츠도 결국 각 모델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했다.
벤츠가 공개한 16개 모델 중 약 80%인 13.5개가 중국산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파라시스 제품이다. 파라시스 제품을 쓴 전기차는 불이 난 차량(EQE 350+) 외에도 EQE의 다른 트림(세부 모델)인 EQE 53 4MATIC+, EQE 350 4MATIC, EQE 500 4MATIC SUV가 있다. 판매 가격이 1억4000만원에 달하는 최고급 전기차 EQS 350(2022년형) 역시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돼 논란이 일었다.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차종은 EQC 400 4MATIC(LG에너지솔루션), EQB 300 4MATIC(SK온), EQA 250(연식에 따라 SK온·중국 CATL 혼용) 등 2.5개에 불과하다.
벤츠는 8월 1일 청라 화재 직후까지만 해도 “자동차 부품 제조사를 일일이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배터리 제조사를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토교통부가 화재 난 차량 배터리 제조사가 중국 파라시스라고 밝히고 나서도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입장을 바꿨다. 벤츠코리아는 “본사, 유관기관, 국토교통부 등과 논의를 마치고 소비자, 시장 요구에 따라 관련 정보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본사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한국 소비자 불신을 더 키운다고 판단해 벤츠코리아가 입장을 바꿨다는 분석이 나온다. 뒤늦게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기는 했지만 이후 논란은 더욱 거세지는 양상이다.
파라시스는 지난해 기준 세계 10위 전기차 배터리 업체로 잇따른 품질 논란에 휘말렸다. 2021년 당시 중국 당국으로부터 고온 환경에서 장기간 사용하면 화재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3만여대 리콜 지시를 받기도 했다. 당시 파라시스는 결함을 인정하고 약 95억원의 리콜 비용을 부담했다. 그런데도 벤츠가 중국산 배터리를 대거 채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벤츠그룹의 1, 2대 주주가 중국 회사인 점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벤츠그룹은 지분 9.98%를 가진 중국 베이징차가 1대 주주고, 2대 주주는 9.69%를 보유한 지리자동차의 리수푸 회장 소유 투자회사인 TPIL이다. 품질 논란에 휘말린 파라시스는 2018년 당시 벤츠그룹과 10년 동안 170GWh 규모의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2020년에는 벤츠가 파라시스 지분 3%가량을 인수하면서 배터리 공동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벤츠 2대 주주 지리자동차가 2022년 파라시스와 함께 전기차 배터리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등 사실상 ‘밀월 관계’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벤츠가 주요 주주인 중국 기업 눈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산 배터리 탑재 비중을 높인 듯싶다. 품질 논란에 그동안 제조사 공개를 꺼렸는데 ‘중국차’라는 비아냥 속에 어렵게 쌓아온 최고급차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여론 뭇매를 맞은 벤츠코리아는 부랴부랴 브랜드 이미지 회복에 나섰다. 8월 14일부터 전국 75개 공식 서비스센터를 통해 벤츠 전기차 무상 점검을 실시 중이다. 또한 국토부 권고에 따라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된 차량 특별점검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청라 화재 사고로 피해를 입은 주민 생활 정상화를 위해 45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벤츠코리아는 “정부 조사에 협력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근본 원인을 파악해 적절한 후속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론은 싸늘하다. 아직까지도 전기차 리콜(자발적 시정조치) 계획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국 조사에 협력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늦장 대처’에 벤츠 차주 불신은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전기차 화재 피해를 입은 아파트 주민간담회에 참석한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주민 불만은 벤츠 측의 무책임한 태도에 있다. 국내에서 매출 8조원, 영업이익 2000억원을 기록하는 벤츠가 그에 걸맞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BMW와의 1위 경쟁서 밀릴 듯
수입차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로 벤츠 매출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본다. 소비자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벤츠 전기차 중고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청라 화재 사고가 발생한 8월 1일부터 7일까지 중고차 매매업체 ‘케이카’의 ‘내차팔기’ 서비스를 통해 접수한 전기차 매도 희망 물량은 직전 일주일(7월 25~31일) 대비 185% 급증했다.
시세도 연일 하락세다. 또 다른 중고차 매매업체 ‘엔카’에는 1만2281㎞ 주행한 EQE 중고차 매물이 5890만원에 올라와 있다. 신차 가격이 92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60% 수준에 그친다. 화재 사고 이전까지만 해도 6000만~7000만원대에 시세가 형성됐지만 가격이 급락하는 양상이다.
한 중고차 딜러는 “청라 화재 사고 이후 벤츠 전기차는 무작정 불안하다는 고객이 적잖다. 벤츠 전기차 매물을 매입해봤자 팔리지도 않을 것 같아 당분간 내연기관차 모델 판매에 주력해야 할 듯싶다”고 귀띔했다.
악재가 겹치다 보니 맞수 BMW와의 1위 경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올 1~7월 기준 수입 승용차 판매량은 14만7629대로 전년 동기 대비 2.8% 줄었다. 주요 브랜드별로 보면 BMW가 4만1510대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벤츠가 3만4380대로 BMW를 바짝 뒤쫓는 모습이다.
이번 사태로 벤츠 전기차 수요가 BMW 등 경쟁사로 대거 넘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벤츠의 1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핵심 전기차 모델에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벤츠와 달리 BMW는 iX1과 iX3만 중국 배터리 제조사인 CATL 제품을 사용했다. i4 eDrive40, i5 eDrive40, i5 M60, iX M60, i7 M70 등 나머지 주요 모델은 삼성SDI 배터리를 탑재했다.
BMW뿐 아니라 독일차 브랜드 아우디, 폭스바겐이 전기차 화재 사고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폭스바겐그룹 산하 아우디, 폭스바겐 브랜드는 한국에서 판매하는 모든 전기차에 100%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온라인 자동차 동호회에서는 벤츠 주요 주주가 중국 자본이라 ‘짱개’와 벤츠의 합성어인 ‘짱츠’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가 무너질 경우 벤츠는 머지않아 국내 수입차 브랜드 2위 자리마저 내줘야 할지 모른다.”
완성차업계 관계자 귀띔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4호 (2024.08.28~2024.09.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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