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 활동가들이 코칭… 비로소 꽃핀 창작의 기쁨

손영옥 2024. 8. 2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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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예술 그 모퉁이를 돌다] <2> ‘밝은방’과 ‘잇자잇자’
국민일보가 장애 예술 현장을 찾아간다. 장애인들이 복지 지원 대상을 넘어 창작의 주체가 되어 예술인으로서의 꿈틀거리는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장애 당사자와 함께 부모, 비장애 전문가, 정부, 기업 등 사회 각 주체가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 그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국 장애예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한편, 해결해야 할 미완의 과제는 무엇인지 점검한다.

창작그룹 ‘밝은방’의 워크숍에 참여한 신경다양성(발달장애 등) 작가들이 지난 22일 서울 은평구 연서로 3길의 밝은방 작업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앞에 두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신동빈 배경욱 정진호 권은영씨. 이들은 주 1회씩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자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간다. 이한형 기자

#1. 지난 22일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 인근의 다세대 주택 1층. 창작그룹 ‘밝은방’의 목요 워크숍에 참여한 권은영· 김치형·배경욱·신동빈·정진호 등 5명의 창작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이들은 자폐, 뇌병변, 정신질환 등 신경다양성(발달장애)으로 불리는 장애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2. 지난 2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음센터). 미디어 아트와 장애예술을 접목하자는 이음센터 공모 사업에 당선된 ‘잇자잇자사회적협동조합’의 프로젝트 퓨처와이드오픈 전시가 있었다. 3일간의 쇼케이스에서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김동현 작가가 창안한 상상의 세계 랍국의 회화 이미지를 키네틱 조각으로, 가상 게임으로 제작해 관심을 끌었다.

장애인들에게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만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 미술작가가 되고자 하는 예술 충동이 있다. 답답한 부모들이 나서 지원하지만 한계가 있다. 장애예술 창작 환경의 불모지 한국에도 최근 10여년 사이 이들을 지원하는 비장애 활동가들이 등장해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 중심에 2018년에 생긴 밝은방과 잇자잇자가 있다.

밝은방은 현재 미대 출신 김효나씨와 김인경씨가 공동 대표로 있다. 수·목요일 이틀간 그룹을 달리해 각각 월 2, 3회씩 워크숍을 한다. 신경다양성 창작자들은 자신이 속한 요일에 와서 3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김효나 대표는 “규칙적으로 와서 각자의 작업을 함께하는 공동 작업실 개념이 강하다”고 말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권은영(16) 회원은 밝은방을 만나며 작업 세계에 전기가 마련됐다. 밝은방이 코로나19 기간인 2022년 8월 중순부터 7주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수도권에 집중된 발달장애인의 창작활동 기회를 전국으로 확대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밝은방 온라인 미술 워크숍’에 참여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게 하지 않고 점, 선, 면 등 아주 단순한 조형 요소를 가지고 응용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권 회원의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방문 미술 교육을 시켰는데, 입시미술 하듯이 가르치더라. 우리 아이만의 그림 세계에 목말라 있던 차에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줌 수업이었지만 장애 예술가들의 내면에 잠재된 예술 충동을 끄집어내는 걸 보고 놀랐다. 7주가 기적 같았다”고 했다. 근육이 감소해 강한 터치를 하지 못하는 딸이 선 몇 개, 점 몇 개로 우는 얼굴을 그린 반추상 작품을 보고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고. 이처럼 김 대표는 자신의 역할을 미술 지도 선생님이 아니라 예비 작가들의 내면에 잠재된 예술 본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이끄는 코치로 인식하는 듯했다.

밝은방 김효나 대표가 권은영씨의 작업을 봐주는 모습. 이한형 기자


중학교 때 담임선생의 폭력을 겪은 뒤 정신질환을 앓게 된 배경욱씨는 어느 날 밝은방에 오더니 절벽이 혀를 내밀며 붉은 해를 삼키는 듯한 초현실적 그림을 그렸다. 알고 보니 지하철을 타고 이곳에 오다가 누군가 던진 바나나 껍질을 봤고 그것이 옛날에 본 영화 바삐용의 절벽 장면으로까지 순식간에 이어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작가의 작업에 어떤 자극을 줄지 고민하게 된다고. 권은영 회원과는 요즘 공책에 글을 써서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다.

“가르친다기보다는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감각, 새로운 매체를 제안하려고 애쓴다. 글쓰기도 그중 하나다.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들은 언어 사용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말로 질문하면 물이 새듯 새 버릴 때도 있다. 글로 질문을 하거나 제안을 하면 오히려 직관적으로 반응하며 그림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밝은방은 신경다양성 작가들의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기획한다. 예컨대 ‘정종필 개인전-가지런한 이야기’는 작가의 부모가 딴 기금 사업의 전시지원을 한 것이다. 2021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공립 미술관 처음으로 한 장애예술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를 기획해 화제를 모았다.

잇자잇자는 미술 평론가 정현, 미술 작가 신제현·홍성용·이비주, 다큐 영화감독 고재필씨 등 비장애활동가들이 조합원으로 출자했다. 정현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역시 자폐, 다운증후군 등 신경다양성 작가 6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작업 공간 겸 전시 공간 ‘위상공간’이 있다. 아트 상품과 미술 작품을 판매하는 아트페어 ‘잇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현 대표는 “작업공간을 갤러리화하는 실험을 했다. 장애 작가의 부모, 그리고 이들에게 시혜적인 사람만 오는, 우리끼리만 하는 장애예술은 의미가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홍제동의 위상공간의 계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현재는 활동 거점을 경복궁 옆 서촌의 ‘아트스페이스 서촌’으로 옮겼다.

사회적 협동조합 ‘잇자잇자’의 기술 기반 프로젝트 퓨처와이드오픈의 전시 장면(위쪽과 아래쪽). 잇자앗자 제공


잇자잇자가 하는 핵심 활동은 장애 작가와 비장애 협력 전문가를 1:1 매칭하는 아트링크이다. 2012년부터 해오던 프로그램으로 파트너끼리 월 1회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동물원,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상을 나누기 위해 그냥 맛집을 찾기도 한다.

“이건 봉사가 아니에요. 거꾸로 우리가 배워요.”

협력 작가인 홍성용씨는 자폐 작가들의 집중력과 성실성을 보며 자신을 반성했다고 했다. 신제현씨는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도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됐다”고 했다.

잇자잇자의 특장점은 평면 회화를 넘어 조각과 설치,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데 있다. 이음센터의 기술 기반 장애예술 공모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퓨처와이드오픈도 그 예이다. 김동현이 펜으로 그린 가상 세계 랍국에 다니는 자동차 등을 입체로 제작하고 모터를 달아 움직이게 했으며, 가상 게임으로도 제작했다.

신씨는 “발달장애 예술은 다르다며 신화화하는 게 어쩌면 장애 예술가의 활동 영역을 한정 짓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보다는 이들이 입체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하고 시도하며 가능성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신의현 작가의 어머니는 “회화가 아닌 입체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길이 없었다. 이곳에서 의현이의 작품으로 악기를 만드는 등 사운드아트를 하게 돼 좋았다”고 말했다.

밝은방과 잇자잇자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김효나씨는 파리 유학 시절 장 드뷔페의 ‘아르브뤼 컬렉션’ 전시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것이 동력이 돼 2008년 장애예술 지원 커뮤니티인 로사이드(Rawside)를 동료들과 만들었다. 잇자잇자의 조합원인 고재필씨도 합류해 둘이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2018년 로사이드가 해체되면서 잇자잇자와 밝은방으로 분화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8년 수원에 생긴 에이블아트센터가 발달장애예술 지원 단체의 시초로 꼽힌다. 그 사이 자폐 디자이너를 직원으로 채용하는 사회적 기업 오티스타, 발달장애예술가 에이전시인 디스에이블드 등도 생겨났다. 장애예술을 지원하는 비장애 전문가들의 활동 반경은 더디지만 다채로워지고 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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