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정부가 금융시장 어지럽히고 남 탓 할 땐가

이동훈 2024. 8. 28.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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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조 빚과 세수 펑크 덫에 갇힌 정부,
내수 진작 위해 안간힘 쓰는 건 이해 가지만

가계 대출 등 부추겨 놓고 한국은행 기준금리 동결 탓에
시중은행 대출금리 압박은 결국 부작용만 키우는 격

아르헨 등 전철 밟지 않으려면 정책 일관성과 신뢰 회복해야

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에 맞닥뜨린 영국의 윌리엄 피트 총리는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을 압박했다. 시중의 현금을 금에 연동시키는 금태환을 중단하고 돈을 무한정 찍어 정부에 대출하라는 것이었다. 국민들 입장에선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이어져 재산권을 침해하는 건 당연했다.

당시 유명한 풍자만화가 길레이가 그린 ‘위기에 빠진 영란은행’은 영국 정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중앙은행의 처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피트 총리가 ‘노처녀(old lady)’ 영란씨에 구애하는 척하면서 호주머니의 돈을 빼가자 영란씨가 비명을 지른다.

“그토록 오래 정절을 지키라고 해 놓고선 당신이 나를 강간하다니!”

결국 워털루 전투 승리로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 그간 중단했던 금태환을 재개해야 했지만 영국 정부는 미적거렸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으려면 세금을 걷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파 이론을 완성한 데이비드 리카도까지 가세한 ‘지금(地金)논쟁’ 끝에 1821년 금태환을 재개했지만 4년 뒤 금융공황이 닥쳤다. 전비 대출이 늘어난 데다 남미 투기 거품이 터졌기 때문이지만 정부와 국민들은 엉뚱하게도 그 탓을 영란은행으로 돌렸다.

200년이 훨씬 지난 서양 고사를 소환한 것은 요즘 살얼음판을 걷는 한국 경제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전비를 마련하지 않으면 나라를 프랑스에 빼앗길 수 있는 피트 정부의 처지까지는 아니지만 윤석열정부 역시 사면초가에 놓여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은 호조세를 이어가지만 서민 경제는 나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달 신규 실업급여 신청이 1년 전보다 7.6%나 늘고 소매판매는 15년 만에 최대폭(-2.9%) 뒷걸음질쳤다. 이 바람에 국내총생산(GDP)은 올해 1분기 1.3% 깜짝 성장 뒤 2분기에 -0.2%로 고꾸라졌다. 올 성장률 전망치를 앞다퉈 올렸던 기관들이 이젠 다시 하향 전망하느라 바쁘다. 국가 채무와 가계 빚이 처음 3000조원을 돌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데다 세수 펑크 규모도 갈수록 커지면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재정 투입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기댈 언덕은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뿐이다. 미국의 9월 금리 인하 전에 한국은행의 선제적인 금리 인하를 기대했던 대통령실이 지난주 금리가 동결되자 “아쉽다”며 유감의 뜻을 표한 건 그만큼 내수 진작이 절실함을 방증한다. 더구나 곧 다가올 추석을 앞두고 날로 악화하는 의료대란에다 경제난까지 겹칠 경우 민심이 흉흉해지는 걸 우려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대통령실의 유감 표명이 유감스러운 건 금융공황을 영란은행 탓으로 돌린 것처럼 모든 책임을 한은의 금리 동결 탓으로 몰아가려는 게 아니냐는 노파심 때문이다. 한은의 금리 인하를 망설이게 한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정부다. 최근 가계대출의 폭발적 증가가 한은의 피벗(통화정책 전환) 즉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정부가 지난달부터 실시키로 했던 2단계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2개월 늦추고 정책 대출을 늘린 영향이 더 크다.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을 공급 부족에서 찾지 않고 실수요 증가 때문이라며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다 뒤늦게 부랴부랴 그린벨트를 풀겠다며 뒷북을 쳤다.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조절을 위해 은행에 대출금리를 올리도록 유도해 놓고는 주택담보대출 증가 속도가 역대 가장 빠른 수준으로 치솟자 은행들에 책임을 전가하며 압박하고 있다. 수비수를 공격수 자리로 옮겨 놓고는 실점하자 공격수 탓을 하는 축구 코치와 다를 게 없다.

저축은행 사태 때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역설했지만, 그런 관치도 일관성과 신뢰를 잃으면 부작용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초 페소화를 미국 달러화와 묶는 강력한 고정환율제를 도입했으나 이후 과도한 재정 지출, 빈번한 정책 변화, 정부의 시장 개입 등이 반복되면서 결국 금융위기와 채무 불이행 사태를 맞았다.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으로 이어진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 베네수엘라도 포퓰리즘 정책이 야기한 경제 피폐의 책임을 중앙은행 탓으로 돌리면서 지금 민생 경제는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 정부도 국민들 소비에 의존하는 내수진작과 한은 몰아세우기에 앞서 정책 신뢰 회복 노력이 급선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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