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고시엔의 기적
기억을 기억하기도 어려운 처지지만 드물게 기억하는 기억 중엔 이런 게 있다. 조숙한 천재가 홈을 파고들다 발목 골절을 당하는 장면이다.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경북고에 맞선 선린상고의 박노준 선수였다. 충격이었고 비극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고교 야구에 더 빠져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오랜만에 고교 야구를 챙겼다. 다들 감동한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기적 말이다. 그런데 웬걸, 소비되는 게 미묘했다. 정치컨설턴트인 박동원이 이렇게 정리했던데 대충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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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자체가 한·미·일 체제의 산물
교토국제고 우승 놓고도 진영 다툼
교육적·야구적 성취 상찬해야 마땅
」
“#진보좌파: 민족의 기개를 일본 땅에 펼쳤다/일본 땅에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지는데 윤석열은 일장기만 흔든다.”
“#보수우파: 너희들이 고시엔을 언제부터 봤다고 민족주의에 빠진 냄비들/봉황대기 때 일본어 교가가 울려 퍼지면 좌파들은 뭐라고 반응할까.”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가도 요즘 이렇게까지 하지 했다. 이보단 복잡한 면이 있다. 야구가 현대사와 뒤엉켜 있어서다. 『야구의 나라』를 쓴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이종성은 “한국 야구가 지금과 같은 지위에 오른 데엔 한·미·일 야구동맹 체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야구에 죽고 사는 미·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 야구의 원류를 만들었던 일본 유학파들이나, 한국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은 한국 야구 역사의 변곡점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일본 스포츠'란 한계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축구에 비해 조선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야구는 미군정 시기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번 우승을 어떻게 봤나.
“4년 전 4강 갔을 때도 기적이란 얘기가 나왔다. 한국계 고교가 고시엔이 참가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데, 성적까지 이렇게 나오고…. 사실 교토가 재일조선인들과 인연이 깊다. 김성근 감독도, 1963년 한국이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우승할 때 감독인 박점도란 분도 교토 출신이라 의미가 있다.”
일본 야구를 이기는 건 숙원이었다. 처음 이룬 게 63년 9월 동대문야구장에서였다. 박점도는 김성근과 달리 고시엔 무대를 밟은 경험이 있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으로 반일 감정이 넘실댔다. 대회로부터 20여 일 후엔 대선이 있었다. 그사이 일본을 꺾은 것이다. 이종성은 “63년 재일교포 선수들의 도움으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던 한국 야구는 일본의 경제 원조를 필요로 했던 한국 정치와 공명하고 있었다”고 썼다.
재일교포 선수들은 그러나 ‘한국인에게 신기하면서 불편한 존재’(김성근 감독)였다. 종국엔 그들의 기여도 잊혔다. 다시 이종성과의 문답이다.
-‘참가만으로 의미 있다’는 뜻은.
“실력도 당연히 열쇠지만, 일본 학교가 아닌 학교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한 없이 뛰게 된 건 그간 재일조선인들이 야구 쪽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많아서인데, 어찌 보면 한국 때문에 국제대회가 된 거다. 우리나라에선 외국계 학교가 주요 대회에 나와 편하게 경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우승이 민족주의적으로 소비된다.
“식민 지배를 받았으니 당연하다. 그걸 떠나 근본적으론 굉장히 어려운 환경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런 이변이 스포츠의 최대 매력이다. 그걸 극대화했다. 한·일 양국에서 교육적으로나, 야구적으로나 높이 평가받을 일이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특히 일본 야구사엔.”
-우린 고교 야구가 이 정도는 아니다.
"(고시엔은) 학생 축제다. 모든 학생이 참여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매니저나 기록원이 되기도 하고 응원단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선 고교 야구는 이젠 그들만의 공간 같다.”
교토국제고의 우승은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다. 진영 공격의 소재로만 동원되는 건 아깝다. 우린 너무 날이 서 있다.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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