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뒤꿈치로 생각하기
생각은 저절로 순환을 하고
문제는 스스로 답을 찾는다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펜을 손에 쥐고 적으며 정리되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카락에 닿을 때 떠오르는 생각도 있다. 몸의 기관마다 특화된 생각의 영역이 있어 그 기관을 거쳐야만 지을 수 있는 생각의 모양과 표정을 발견하면 기쁘다. 등이나 엉덩이, 뒤꿈치를 사용해야만 도착 가능한 생각의 형태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각은 뒤꿈치로 하는 생각이다.
뒤꿈치로 하는 생각은 나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간다. 걷기 시작했을 때보다 늘 더 많은 것이 내게 쥐어져 있다. 내 안에 갇혀서는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을 때, 나는 걷는다. 코스가 정해진 산책길이든 처음 가보는 길이든 무작정 걷는다. 뒤꿈치가 바닥에 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쳐가는 풍경들을 촉매 삼아 생각의 순환이 일어난다. 잊고 있던 어휘들과 몸 구석 어딘가에 깔려 있던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불필요한 생각들은 증발하고 전에 없던 것들이 내 몸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제멋대로 어슬렁거리고 신나게 방랑할 때 뒤꿈치로 흡수되는 영감이 새로운 대답을 부른다. 뒤뚱거리는 참새의 꼬리를 바라보다 언젠가 차 안에서 들었던 라디오 사연이 기억나고, 계수나무의 완벽한 하트 모양 잎새에 감탄하다가 몇 년 전 비행기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가며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이게 처음부터 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방금 바라본 나뭇잎에 비친 햇살이 내게 준 축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뒤꿈치를 경유해야만 가능한 이 우연한 연결과 발상의 힘을 믿을 뿐이다.
외부의 도움 없이 내 안에서 해결해야 할 생각도 있다. 정보는 충분한데 결론이 빈약하게 느껴질 때, 너무 많은 생각이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을 때, 내 인식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싶을 때 나는 엉덩이로 하는 생각의 힘을 믿는다. 우직하게 의자에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위해서. 내 안의 아주 깊은 곳까지 가보아야 만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는 걸 믿으면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어질러진 생각들 간의 질서와 패턴이 눈에 들어오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 하나하나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퍼즐을 모두 맞추면 더 깊은 생각으로 갈 수 있는 지도가 생긴다. 그 지도는 나를 조금 더 앞으로 가게 하고, 운이 좋으면 내 안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등으로 하는 생각은 참 신기하다. 하루 동안 미뤄두고, 묻어두었던 생각들이 침대에 등을 대는 순간 후루룩 밀려온다. 작은 절망, 뾰족한 실망들이 불현듯 떠올랐다가 조금씩 마모된다. 후회나 미련인 줄 알았던 감정들을 천천히 등으로 소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치 해방감을 누린다. ‘그때 그러지 말걸. 이건 정말 다행이었어. 아까 그건 뭐였지?’ 불필요한 느낌이 마음에 눌어붙지 않도록 살살 떼어낸다. 마무리되지 않은 생각들은 적절한 봉투에 넣고 리본으로 묶어 서랍에 넣어둔다. 오래갈 줄 알았던 좌절과 들뜨게 기뻤던 감동도 차분히 정리하여 내 안에 쌓아 둔다.
‘몸으로 생각하기’는 내 몸에게 해 줄 수 있는 꽤 좋은 일들 중 하나지만 애석하게도 올여름만큼은 그 좋은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걷기도, 앉아 있기도, 등을 대고 온전히 잠을 기다리기도 너무 더웠다. 더위에 맞서 하루하루 견디는 것만으로도 쉽게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 무기력함이 단순히 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뒤꿈치를 통해 환기해야 할, 엉덩이를 사용해 발전해야 할, 등으로 소화해야 할 내면의 소리가 내 안에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서가 지나도 낮은 축축한 늪지대처럼 숨 막히는 날들이지만, 오늘 아침 바람엔 분명 가을 정취가 담겨 있었다. 혹독한 여름을 견뎌낸 내 몸에게 오늘 밤 내가 줄 선물은 시원한 늦여름의 밤바람과 함께하는 뒤꿈치로 생각하는 시간이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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