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정치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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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곧 말이니, 정치부 기자는 정치인의 말을 많이 들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진짜 정치인이라면 '정치인이 협치한다'는 그저 동어의 반복일 뿐 아무런 메시지도 아니라고 다시 말해줘야 옳다.
올 들어 언젠가부터 정치부 지면은 당연한 말을 하다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되풀이하다가, 그 책임을 놓고 서로를 탓하는 이야기들로만 채워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이름에 맞는 본분을 다했다면 그 숭고한 낱말이 곳곳에서 '정치질'로 변형돼 발화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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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곧 말이니, 정치부 기자는 정치인의 말을 많이 들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조언을 새기는 와중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그런데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나”였다. 과연 아름다운 구호가 부족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다지도 힘들어하는 것일까. 때가 되면 개념도 용례도 문득 뒤바뀌는 그 말들이 그리 중요한가, 주제넘은 생각마저 들곤 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이들도 공통적으로 민생과 정의를 말하고 있었다. 말과 뜻이 같다면 낯을 붉힐 일도, 법안이 뺑뺑이 도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물론 당연한 말조차 구하지 못하는 새벽이 훨씬 많다.
정치가의 말은 다른 일터 사람들의 말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저 제 할 일을 했거나 혹은 ‘하겠다’고만 약속하더라도 많은 칭찬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앞으로는 국민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겠다는 말이나 누구와 만나 밥을 먹겠다는 말이 그 자체로 모두 큼지막한 기사로 쓰였다. 싫은 티 못 내면서 조용히 제 할 일이나 하는 여염의 현실과는 아무래도 다른 대접이다. 배송기사가 “오늘, 차에 시동을 걸겠다”고 결심하거나, 신문기자가 “앞으론 열심히 취재하겠다” 다짐한들 기사로 쓰일 리 만무하다.
이는 꼭 정치인이 우리 중에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당연해 보이는 그 말들이 큰 기사가 되는 이유는 한편으론 그게 매우 흔치 않은 일이라는 반증이다. 대화하고 타협하는 일이 본분인 이들이 대화하고 타협한다고 말하면 언론은 협치의 분위기가 드디어 찾아왔다며 칭찬을 해줬다. 기사에 우쭐했다면 뭔가를 잘못 생각한 것이다. 진짜 정치인이라면 ‘정치인이 협치한다’는 그저 동어의 반복일 뿐 아무런 메시지도 아니라고 다시 말해줘야 옳다.
올 들어 언젠가부터 정치부 지면은 당연한 말을 하다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되풀이하다가, 그 책임을 놓고 서로를 탓하는 이야기들로만 채워지고 있다. 여야 대표가 만나서 무얼 대화할 것인지 얼른 고르지 못하고, 대통령 명의 축하 난이 야당 대표에게 당도할 시간도 정하지 못하고, 공론장은 파행되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진실을 항변하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이러한 일들은 남긴 것이 없되 많은 것을 보여준다. 회의마다 같은 자료를 들고 와 종전 의견을 고집하거나, 만나기 꺼려지는 고객은 영업하지 않겠다고 뻗댄 직장인은 과연 무슨 대접을 받을까.
한때 집권여당을 이끌었던 한 정치인이 “과학도 산업도 스포츠도 발전했지만 정치는 인류 역사상 과연 발전했느냐”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인재를 널리 등용하라는 말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약이라는 말이나, 윗사람부터 약속을 지켜야 법도가 선다는 말 따위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에도 있었다. 거짓말로 남을 헐뜯으면 안 된다는 말은 유치원생이 배운다. 그러나 평생을 정치에 투신한 이마저 “제자리걸음을 하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게 정치의 현주소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어렵고 ‘다양화 속 공동선’이 어렵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다만 이쯤 되면 정치의 쓸모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일부 계층의 잘 팔리는, 영원한 산업이 아닐까 한다. 투표율은 정당 체제의 이념적 분화 정도가 작을수록 낮아진다고 학자들의 책에 쓰여 있다. 어려운 말이지만 이는 결국 맥줏집이나 경로당에서 흔히 들리는 “그놈이 그놈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정치인들이 이름에 맞는 본분을 다했다면 그 숭고한 낱말이 곳곳에서 ‘정치질’로 변형돼 발화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번역되기 어려운 부분이 문학의 정수이듯, 문외한에게 의아한 장면이 오히려 정치의 본질인 것 같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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