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의 마음 읽기] 모욕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물이 공유된 텔레그램 방의 존재가 알려진 뒤 한 SNS 계정을 통해 피해 지역과 학교 목록이 공개되었다. 추가 제보가 이어지고 있는 딥페이크 피해 학교 목록을 지켜보는 동안 아이의 중학교 첫 등교일이 떠올랐다.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걸 가장 크게 실감한 건 아이한테 분홍색 이불이나 콩순이 화장놀이 세트를 사줄 때도 아니었고 생리대나 속옷을 사줄 때도 아니었다. 아이한테 처음으로 교복 치마를 입혀야 했을 때였다.
아파트 정문에 서서 중학교로 걸어가는 아이들의 등교 행렬을 보던 기억이 선명하다. 막 열네살이 된 여자아이들이 3월 추위에 떨면서 얇은 스타킹 하나에 의지한 채 맨다리를 드러내고 걷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차림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같이 뛰던 남자아이들과 복장 하나로 분리되어버린 것 같은 행렬이었다. 아이는 곧 교복 치마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여벌 바지와 체육복으로 중학교 생활을 났지만, 막 어린이 시기를 벗어난 여자아이들이 첫날 걸쳐야 했던 교복의 모든 요소가 내게는 아이들이 겪어갈 시간에 대한 예고편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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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딥페이크 성범죄 전국으로 확산
텔레그램방 참여 인원 22만 명
친구 신뢰할 수 없게 하는 범죄
그래도 SNS 비공개 권유 않을것
」
아이가 중학생이 되자 길을 갈 때면 자연스레 아이 또래의 중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아이들은 서넛만 모여도 여자한테 쓰는 욕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건 너무도 친근한 호칭처럼 들려서 남자아이들은 친할수록 서로를 그 욕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십대, 이십대를 지나면서 주위의 남성 집단에서 겪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남성 무리를 재현하는 서사물에서도 익히 보아오던 상황이었다. 여자한테 쓰는 가장 흔한 세 음절의 욕. 그 욕을 여자한테 쓰는 대신 서로한테 쓰는 것. 이제 내 아이의 친구들이 그걸 하고 있었다.
기자이자 언어학자인 어맨다 몬텔은 젠더화된 모욕에 대해 다룬 글에서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자를 모욕하고 싶다면 걸레라고 불러라. 남자를 모욕하고 싶다면 여자라고 불러라.’ 여성에 대한 모욕이 성적 의미를 띠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성을 향한 어떤 욕도 여성을 향한 욕만큼 모욕의 뉘앙스를 제대로 불러오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여자 욕으로 부르면서 모욕의 재미를 이미 가볍게 체득해버린 것일까? 익히 보도되었듯 딥페이크 텔레그램 방에서 이루어지는 건 여자들을 모욕하는 일, 그중에서도 아는 여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텔레그램방의 불법합성물 제작 채널의 참여 인원은 22만명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중고등학교 겹지인 채널 내부에는 ‘중·고교 겹지인방’, ‘지인능욕방’, ‘합사(합성사진) 요청방’ 등의 단체대화방이 있다. 가해자의 상당수는 10대 남성이다. 전국 대부분의 학교라고 봐도 무방할 피해 학교 목록이 텔레그램 직접 잠입과 제보로 업데이트되는 동안, 지역 커뮤니티에서는 남학생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며 해당 학교 학부모들이 피해 현황 공유 게시물을 이동시킨다. 학교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대응책이 가정통신문으로 오는 동안 한 대학 커뮤니티에서는 ‘겹지방 들킬까봐 불안해하지 말라. 정보를 남긴 게 없다면 잡힐 리 없으니 걱정 말고 즐겨라’는 글이 공유된다.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아이는 종종 내게 남자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과 맞먹거나 이겨 먹는 것 같았던 여자아이들은 마치 짧은 교복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교실 안의 혐오 표현에 노출되어갔다. 아이는 여자아이들이 교실에서 못 들은 척 견디는 표현들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내가 남자아이들을 너무 비난하지 않길 바랐다. 그 애들은 어쨌든 반 친구들이었다.
어른들이 한발 떨어진 곳에서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동안 남자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직접 부딪쳐 살아가야 하는 건 여자아이 당사자들이다. 동네 친구이고 학교 친구인 남자아이들, 그 애들은 여자가 같은 공간에 있건 없건 서로를 여자 욕으로 부르는 아이들이지만 또한 초등학교 때 같이 미끄럼틀을 타던 아이들이고 중간고사가 끝나면 같이 방 탈출 카페에 가는 아이들이다.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이들은 친구이기에 더욱 가능할 수 있는 성범죄 앞에 서게 되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특정할 수 없는 채로 아이들은 친구 목록의 누구도 신뢰할 수 없게 하는 대규모 범죄 현안을 받아들게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프로필 사진을 내리라거나 SNS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라고 할 마음이 없다. 더는 여자아이들의 세상을 좁게 만드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 N번방과 코로나를 거치면서 우리를 통렬히 흔들었던 질문 앞에 우리는 지금 다시 서 있다.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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