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시간 그립감
지하철 승객으로 살아온 지도 어언 24년, 웬만하면 몸이 알아서 한다. 출퇴근 구간에서는 더 그렇다. 몸을 열차에 얹으면 길은 흘러가고 나는 옮겨진다. 방금까지 신분당선에 있었는데 어느새 내 몸이 9호선으로 옮겨진 걸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모르는 사이에 몸이 열차 환승을 해낸 것이다.
이 자동화 덕분에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할 때 헤맨다. 수동 모드로 단단히 긴장하지 않으면 몸이 익숙한 동선을 따르는 것이다. 제때 내리지 못한다거나 반대 방향 열차를 타는 식으로 말이다. 최단 경로는 멀어지고, 뒤늦게 노선도의 생소한 역명들을 암벽등반용 홀드처럼 보며 이리저리 궁리해야 한다.
어느 초행길에서도 그랬다. 잠시 방심했더니 샛길로 빠졌다. 부랴부랴 올라탄 열차에는 빈자리가 좀 있었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한데도 열차 안으로 길게 들어오던 느슨한 햇빛에 자꾸 눈길이 갔다. 탈 일이 거의 없는 노선이었으므로 그 햇빛은 내가 평소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햇빛이었다. 낯선 것을 살피느라 마음의 조리개가 서서히 움직였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만지는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 그립감’ 같은 것.
이런 감각은 분명 카이로스에 대한 것일 테다. 시간을 부르는 두 이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따로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고유한 질감을 가진 시간인 카이로스를 말하기 위해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를 짚고 가니까. 누구에게나 일정하게 주어지는 크로노스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카이로스의 경험을 많이 하자고 다짐하는 순간에도 크로노스의 시간은 강처럼 흘러간다. 크로노스의 계산법으로 보면 그날 내 시간은 20분쯤 휘발되었다. 허비에 가깝다. 그렇지만 카이로스의 기분으로 보면 다른 풍경이 된다. 낯선 열차에서 마주친 햇빛은 마치 시간의 꼬리 같았고, 그 꼬리가 손에 잡힐 것처럼 천천히 춤추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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