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땀이 섞인 '흙니폼'…한화의 야구에는 낭만이 있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야구에는 '낭만'(浪漫)이 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또 한 번 좌초하는 듯했던 한화가 다시 날아오르고 있다. 한화의 8월 성적은 26일까지 13승 7패. 삼성 라이온즈(14승 6패)에 이어 월간 2위다.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인 5위를 바짝 따라붙어 가을야구까지 넘보고 있다. 혹서기 원정경기용으로 제작한 푸른색 서머 유니폼을 입고 14승 3패를 올려 '푸른 한화'라는 새 별명도 얻었다. 그 반전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건 유니폼이 아니라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다.
한화 투수 이상규(28)는 지난 24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이 끝난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이날 2이닝 무실점으로 역투해 1553일 만에 프로 통산 세 번째 승리를 챙겼다. 경기 후 소감을 말하다 울컥한 그는 "4년 전 1군에서 뛸 때는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시기라) 야구장에 팬이 없어서 이런 감정을 잘 몰랐다"며 "한화 팬들이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응원가를 부르며 정말 행복하게 응원해주시는 걸 보고 많이 벅차고 설렜다"고 했다.
이상규의 야구인생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5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그는 2019년에야 1군에 데뷔했다. 2020년 임시 마무리투수까지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듯했지만, 이후 경쟁에서 밀려 자리를 잃었다. 지난해에는 끝내 육성 선수로 전환됐다가 시즌 종료 후 2차드래프트를 통해 한화로 이적했다. 이상규는 "팀을 옮길 때도 많이 울었다. 육성선수까지 됐으니 '한화에서도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이제 나도 곧 잘리는 건가' 싶었다"고 토로했다.
의지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처음 1군에 올라온 6월엔 2경기만 소화하고 다시 2군에 내려갔지만, 지난 3일 돌아온 뒤에는 불펜에서 쏠쏠한 활약을 했다. 이달 9경기에서 1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이상규는 "많은 좌절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 한화에 온 덕에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한화 내야수 황영묵(25)의 유니폼은 언제나 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원래 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라 '흙니폼'(흙+유니폼)으로 불린다. 그는 JTBC 야구 예능프로그램 '최강야구' 출신이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대학에 갔지만 곧 중퇴했고, 독립야구단에서 뛰다 올해 신인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한화의 지명을 받았다. 어렵게 기회를 잡은 황영묵에게는 매 경기가 전쟁터다. 그는 "여기(프로)까지 오는 데 6년이 걸렸다. 그래도 한 번도 '내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황영묵은 입단 첫해부터 한화의 확실한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26일까지 98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4·홈런 3개·31타점·44득점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화의 1번 타자로 나서고 있고, 수비와 베이스러닝에서는 숫자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라운드에 나서는 그의 눈빛을 김경문 한화 감독도 눈여겨봤다. 김 감독은 "황영묵은 신인인데도 벤치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다. 팀에 꼭 필요한 플레이를 한다"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많이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황영묵은 여전히 쉽게 웃지 않는다. '또 다른 황영묵'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매일 묵묵히 치고 달린다. 그는 "나는 그저 야구를 너무 사랑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믿고 야구를 했더니 길이 열렸다"며 "독립리그와 아마추어에 열심히 하는 선수가 많다. 프로에서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화 외야수 장진혁(31)은 서른이 넘어서까지 좀처럼 프로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2019년 113경기에 나서긴 했지만, 이후에도 부침을 거듭하다 2020년 군대를 다녀왔다. 그런 그가 올해는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지난 23~25일 잠실에서 19년 만의 두산 3연전 싹쓸이에 큰 힘을 보탰다. 23일엔 3점 홈런 포함 4타점 맹타를 휘둘렀고, 25일엔 1-1로 맞선 6회 결승 적시 2루타를 쳤다.
장진혁은 감격하지 않았다. 반성부터 했다. "군 복무까지 마친 데다 나이도 많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경기에 나가서도 늘 중간에 빠지는 일이 많아 힘들었다"며 "요즘 성적이 좋다 해도, 그전에 내가 못했던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고 했다.
장진혁의 한 시즌 최다 홈런은 2022년 기록한 2개다. 올해는 벌써 9개를 때려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까지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내가 주전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고 했다. 그저 "하루 좋다가도 다음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야구다. 한 경기, 한 경기 일희일비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할 생각"이라며 "매 순간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숱한 환희와 좌절 속에 쌓아올린 평정심이다.
한화는 꽤 오랫동안 하위권을 맴돌았다. '달라진 우리'(Different Us)를 선언했던 2024년의 여정도 변함없이 험난했다. 잠깐이지만 또 최하위를 찍었고, 시즌 도중 사장과 감독이 바뀌었다. 그러나 한 번 넘어진 이후의 회복력은 확실히 예전과 많이 다르다. 한화는 언제 좌절했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가을을 꿈꾸기 시작했다. 한화 에이스 류현진(37)은 "젊은 선수들부터 베테랑까지, 누구 한 명 빠짐없이 경기의 모든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그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서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만 하자'고 말해준다"고 했다.
종착지가 어디든, 한화에게는 잊지 못할 8월이 끝나가고 있다. 이제 한화는 더 높은 곳에 서 있을 9월의 비상을 준비한다. 오랜 기간 간절하게 흘린 땀과 눈물이 그 원동력이다.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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