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선 자벌레 신부의 생명과 평화 이야기
[이완우 기자]
▲ <너 어디 있느냐>(문상붕 외 3인, 파자마, 2024.8.15) 책자 표지 |
ⓒ 도서출판 파자마 |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이날에 맞추어 문규현 신부의 이야기 책 <너 어디 있느냐>(문상붕 외 3인, 파자마)가 출간되었다. 오늘의 고통을 은총으로 바꾸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실천으로 바꾸려는 한 사제의 생명, 평화, 통일, 사랑, 헌신,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등 뜨거운 신앙고백이다. 이 책은 300쪽 분량으로 5부까지 구성되었다.
1부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
2부 사제가 된 문규현의 모습.
3부 평양에 있던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벽을 넘는 과정.
4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를 하는 고난의 시간.
5부 문규현 신부가 살아온 삶의 의미.
전북에서 국어교사모임 활동으로 교육 현장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문규현 신부를 수십 년 동안 바라봐 온 네 교사( 문상붕, 이정관, 장진규와 형은수)가 <너 어디 있느냐> 책을 공동 집필하였다. 이 책은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 낮은 곳에서 사제의 소명을 실천한 문규현 신부의 삶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교사들은 국어 수업 자료 제작에서 출발하여 <국어시간에 시읽기 2. 4>, <백석을 읽다>, <윤동주를 읽다>, <이육사를 읽다>, <시에서 삶을 읽다> 등 충실한 대안교과서를 펴냈으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질곡의 삶을 살았던 위 세대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규현 신부는 어린 시절에 익산 황등공소에서 살았다. 그 시절을 형(문정현 신부)이 회고하는 장면이 책 15쪽에 펼쳐진다.
우리는 철길을 마주 보는 곳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집이 바로 황등리 공소였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도 많았다. 거제도 수용소 포로 출신인 사람도 두 분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늘 당신들보다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길을 가다가도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여 보냈고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익산 황등공소에서 문규현 신부가 생활한 어린 시절은 그가 성장하면서 걷게 되는 인생 여정의 전제이며 복선이었다. 그는 1976년 5월 사제 서품식에서 인간으로 엎드렸다가 사제로서 일어섰다. 그는 살아가면서 자신을 지켜나갈 하느님의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창세 3, 9)
주님께 바라옵는 이 몸이오니 오롯함과 바름이 나를 지키게 하소서. (시편 25, 21)
"문규현 바오로, 너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망설이지 않고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오롯함과 바름으로 사제로서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다짐 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규현 신부가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걷는 길은 낮은 데로 눈이 향하면 소외된 것들이 보이는 길이었다. 그가 걷는 길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차별이 사라졌으며, 연대가 생기고 자비가 퍼지며 사랑이 샘솟았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싹트고 평화가 흐르기 시작했으며, 진정하게 사람 사는 길이 열렸다.
그는 대지에 엎드리면서 알게 되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걷는 것보다 엎드린 것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땀과 헌신이 있어야 희망이 싹튼다는 순리를 대지에 들었다. 그는 순례길에서 오체투지를 하면서 작은 미물에게서도 배웠다.
문규현 신부가 순례자들과 함께 오체투지를 하며 조금씩 전진하며 길 위에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길은 내고 있을 때의 일화가 책 256쪽에 실렸다. 이 일화에서 문규현 신부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송탄을 지나는 길에 꼬마 아이들이 지나가다 도로에 몸을 던지는 오체투지를 보고 깜짝 놀란다. 사람들이 길에 넘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나 보다. 그래서 하는 말. "어? 자빠지네!" 그 말을 들은 순례자들의 입가에 참았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지나도 순례자들이 몸을 바로 세워 일어나지 않으니 "어? 자빠져 죽었네!" 이 말을 들은 진행 팀과 순례자들은 큭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 동안 천 번 넘게 죽었다 살았다 하면서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몸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엎드려 있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없이 엎드려 쉬고 싶었다. 쉬는 시간이면 기댄 몸을 일으키기가 싫은 것은 성직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길을 재촉하는 징을 치는 지관 스님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좀 천천히 치면 안 되나? 꼬박꼬박 징 치는 모습이 인정머리 없는 기숙사 사감 같았다.
이 책 <너 어디 있느냐>는 왜 지금 문규현 신부인가를 그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답해주고 있다. 문규현 신부는 낮아져야 세상이 맑아지는 것을 아는 사람, 스스로 지렁이를 닮으려는 사람, 오염된 세상에 숨구멍을 내고자 부단히 꿈틀거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길바닥 신부'라 말하고, 누구는 그를 '길 위의 신부'라 부르기도 한다.
문규현 신부가 '길 바닥 신부'로서 삼보일배를 하며 길 위에 오랜 시간을 진행하여 기진맥진할 때였다. 생명이고 평화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땡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 녹슨 못처럼 말라비틀어져 가는 지렁이가 눈에 들어왔다. 문규현 신부는 자신의 모습과 같은 지렁이를 향해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숙였다. 그 순간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 하나에 죽은 듯하던 지렁이가 깜짝 살아 꿈틀거렸다.
지렁이 성자 (손택수)
얼마나 낮고 낮아져야 우리는 비구름을 품은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요
몸속의 땀방울을 빗방울로 바꿀 수 있을까요
지렁이에 비하면 자신은 한참이나 멀고 멀었다는 신부님
<너 어디 있느냐>. 이 책으로 문규현 신부를 다시 불러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명과 평화와 통일의 길을 온 삶을 다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 문규현 신부가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남북 민중들의 고난과 뭇 생명들의 절규를 참회하고 고행으로 바꾸기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귀하기 때문이다. 통일이 멀어지고, 생명이 죽어가는 시대이기에 우리는 다시 문규현을 불러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은 것이다.
문규현 신부가 2011년 1월에 천주교 전주교구 평화동성당에서 주임신부로서 송별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가 평신도로 돌아가서 새로운 생명 평화의 길을 나설 때, 홍성담 화백이 송시를 낭송하였다.
저기 사람이 간다
저기 한 사람이 기어간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예, 제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절망의 서러운 눈물과 고통의 피와 땀이 절여있는
이 붉은 땅을 지금 제가 기어가고 있습니다
저기, 저기 신부님이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하루 내내 마른 등허리 위에 떨어지는 하얀 매화꽃 털며
야윈 등은 하늘에 닿고 누런 정강이와 배는 땅에 닿아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사람이 가로막힌 두터운 벽을 머리로 밀고 또 밀며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후략)
이 책의 1장부터 5장까지 각 장의 첫 쪽은 선명한 하늘색 속지이다. 1장부터 5장까지 속지에 하늘을 향한 고갯길에 자벌레가 점점 높이 기어 올라간다. 희망의 상징이다.
자벌레는 자나방의 애벌레이다. 나뭇가지를 타고 천천히 그러나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동하며 숨바꼭질하듯 나뭇가지처럼 의태 하기도 한다. 자벌레는 다른 애벌레와 달리 배다리가 퇴화하여, 가슴다리와 배 끝다리로 기어간다. 자벌레는 온몸을 크게 구부렸다가 일자로 몸을 죽 펴서 기어가는 유별난 움직임을 보인다.
순례자들이 오체투지 하며 삼보일배하는 모습이 자벌레가 기어가는 모양을 닮았다. 순례자들이 오체투지 하며 희망을 키우며 소망하듯이, 자벌레도 번데기를 거쳐 우화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너 어디 있느나' 이 책의 갈피를 한 장씩 넘기면 자벌레와 함께 여러 순례자와 함께 희망을 찾아 길을 가고 있는 문규현 신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현재 문규현 신부는 서해 새만금의 해수 유통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 전주교구와 환경 생명 평화을 위한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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