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 3.2% 늘린 677조원…경기침체 우려에도 ‘긴축 페달’
윤석열 정부가 내년 예산을 677조4000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올해 예산(656조6000억원) 대비 20조8000억원(3.2%) 늘렸다. 경기 침체 우려에도 불구하고 2년째 총지출 증가율을 3% 내외로 묶었다. ‘긴축 재정’에 가속 페달을 밟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하지만 내년 성장률이 다소 둔화할 것으로 전망하는 상황에서 재정의 ‘경기 마중물’ 역할엔 한계가 있다. 감세 등에 따른 세수(국세 수입) 펑크 여파로 재정의 손발이 묶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획재정부가 27일 발표한 ‘2025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예산의 핵심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이어진 ‘긴축 재정’이다. 공적연금ㆍ건강보험 등 정부가 임의로 씀씀이를 줄일 수 없는 의무 지출을 제외한 ‘재량 지출’을 올해보다 0.8% 늘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사라진 2023년(-14.7%)을 제외한 최근 10년간 증가율이 가장 낮다.
윤석열 정부 3년간 총지출 증가율(본예산 기준)은 연평균 3.9%를 기록, 4%에 미달한다. 문재인 정부(8.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명박(6.3%)ㆍ박근혜(4.2%) 정부보다도 낮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2.9%로 낮추며 재정준칙 한도(3.0%)를 지켰다.
정부는 재정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쓸 때는 쓰겠다고 강조했다.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해 24조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도 이뤄졌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재정을 지키고자 한다. 재정의 규모보다 재정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며 “사회적 약자와 소상공인 등 꼭 필요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고 설명했다.
긴축 예산 곳곳에서 ‘핀셋 복지’ 확대가 두드러진다. 4인 가구 기준 생계급여를 연 141만원 올린다. 노인 기초연금은 1인당 33만4000원에서 34만4000원으로 인상한다.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지급할 때 기준으로 삼는 중위소득(전체 가구 소득을 한 줄로 세웠을 때, 중간 위치 소득)을 역대 최대폭(6.42%) 올린 영향이다.
노인 일자리는 올해 103만개에서 110만개로 늘린다. 대학생 주거안정장학금(월 20만원)을 신설하고, 국가장학금 지원 대상은 기존 100만에서 150만명으로 확대한다. 영세 소상공인 67만9000만명에게 배달ㆍ택배비(연 30만원)를 지원한다. 병사 봉급(병장 기준, 준비금 포함)을 월 165만 원에서 205만 원으로 올린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한 보건ㆍ복지ㆍ일자리 예산 증가분(11조4000억원)이 전체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며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씩 ‘민생회복지원금’을 주자는 야당의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에 선을 긋고 민생에 집중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국가 경제 규모가 커지는 만큼 전반적인 예산 지출이 늘어나야 자연스럽다. 핀셋 복지를 늘리는 것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내년 예산 지출 증가율(3.2%)은 총지출 개념을 도입한 2005년 이후 올해(2.8%)와 2010ㆍ2016년(각 2.9%)에 이어 4번째로 낮다. 내년도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의 합) 전망치(4.5%)를 밑돈다. GDP에서 차지하는 정부 재정의 역할 비중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내년 예산안이 건전 재정을 넘어 ‘초(超) 긴축재정’이란 평가까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올해는 최소 10조원의 ‘세수 펑크’가 확실시된다. 하지만 법정 의무지출과 연구·개발(R&D) 예산 증액, 의료개혁 등 최소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적자를 늘리거나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도 정부의 선택은 ‘지출 증가율 감속’이었다. 최상목 부총리는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한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들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크게 약화했다. 지금은 이것을 정상화하고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재 경제 상황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긴축 재정을 해도 좋지만, 경기가 나쁠 때는 재정을 더 풀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진다. 내수를 진단할 때 쓰는 소매판매는 2분기에 1년 전보다 2.9% 줄었다. 9분기 연속 감소세다. 감소 폭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9년 1분기(-4.5%) 이후 15년 만에 가장 크다.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15~29세)은 7월 기준 역대 최대치(44만3000명)를 기록했다. 지난해 자영업자 폐업률은 9.5%로 나타났다.
재정을 아끼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재정을 아껴야 한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를 뒤로 미룬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을 조여 내수를 살리기 어려워졌다. 정부가 건전 재정의 덫에 갇혔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예산을 짤 때는 재정의 역할과 재정 건전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며 “건전 재정에 치우쳐 경기 침체 상황에서 재정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어 “올해 상반기(1~6월)에 1년 전보다 9조9800억원(5.6%) 줄었을 정도로 열악한 세수가 초긴축 재정 기조로 이어졌다”며 “예산 운용을 제약하는 세수 부족문제를 해결할 대안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체적인 재정 여력이 줄며 내년도 전체 보건·복지·고용 분야 지출 증가율(4.8%)이 올해 증가 폭(7.5%)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2023년(4.1%)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대표적인 내수 부양 예산으로 꼽히는 사회간접자본(SOCㆍ25조5000억원) 분야 지출은 올해보다 3.6% 줄었다. 다만 김동일 기재부 예산실장은 "재정 총량을 두고 재정 역할 하느냐 못하느냐를 볼 것은 아니다"라며 "총량의 성장 기여도는 낮지 않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올해 큰 폭으로 삭감했던 R&D 예산은 29조7000억원으로 다시 지난해 수준으로 확대했다. 11.8% 늘려 주요 분야 가운데 증가율이 가장 높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재정 건전화 노력, 또 부족한 재원에도 불구하고 약자복지·의료개혁 등에 중점을 두면서 재정적자를 줄인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세수 기반 확충에 대한 고민 없이 지출만 줄이는 방향의 건전재정은 중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긴축 재정을 하더라도 성장을 북돋는 예산은 늘리고, 지지부진한 연금ㆍ노동ㆍ교육 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기업 규제를 풀고 인공지능(AI) 기본법, 재정준칙 같이 정쟁의 대상이 아닌 입법에 속도를 내는 등 재정 밖에서 정부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나상현·이우림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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