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대화 실종 시대

김나래 2024. 8. 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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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이 쓴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다 엉뚱한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가족을 떠나 잠시 먼 외가 친척 집에 맡겨진 소녀의 일인칭 시점에서 쓰인 소설인데, 소녀를 맡기러 온 아빠와 친척 아저씨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소설이지만 성별을 떠나 어른들 대화의 실체를 예리하게 간파한 문장에 꽂혀 생각이 잠시 옆길로 샜다.

이렇게 쭉 나열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가히 '대화 실종 시대'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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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래 사회부장


클레어 키건이 쓴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다 엉뚱한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가족을 떠나 잠시 먼 외가 친척 집에 맡겨진 소녀의 일인칭 시점에서 쓰인 소설인데, 소녀를 맡기러 온 아빠와 친척 아저씨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비 이야기로 시작해 소의 가격, 유럽 경제 공동체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지만 소녀는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쓸데 없는 주변 얘기만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소설이지만 성별을 떠나 어른들 대화의 실체를 예리하게 간파한 문장에 꽂혀 생각이 잠시 옆길로 샜다. 뉴스에 등장하는 무수한 ‘대화’ 장면을 떠올려본 것이다. 뉴스 속 대화엔 좀 더 거창한 이름들이 붙어 있지만, 본질은 역시나 ‘대화’다.

통상 여야 수장의 대화엔 ‘여야 대표 회담’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정치인들은 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방식과 논의 주제 등을 두고 온갖 힘겨루기를 펼친다. 이번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회담 과정을 전부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회담 내내 지켜볼 국민을 의식하면 좀 더 건설적인 정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란 취지라고 한다. 그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신선한 시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편에선 한 대표가 내심 ‘검사 DNA’를 발휘해 각종 재판 중인 이 대표를 국민 앞에서 취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 아니냐고 의심한다. 여당은 꼭 생중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사회 경제 분야엔 대표적으로 ‘사회적 대화’가 있다.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는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위원회에서는 ‘정부, 사용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는 모든 형태의 교섭, 자문, 정보 교환’으로 이를 정의하면서 ‘사회적 협의’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경사노위 위원장을 지낸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26일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에 제출한 서면 질의 답변서에서 ‘사회적 대화로 해결’이라는 표현을 51번이나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야당과 노동계는 ‘노조 혐오’ 발언을 쏟아냈던 과거를 근거로 그의 대화 의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주요 갈등 사안이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 종종 ‘만나서 대화하자’는 말은 주문처럼 사용된다. 6개월 넘게 이어지는 의·정 갈등 중에도 의료계와 정부는 상대방을 향해 “언제든지 만나서 대화하자”는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대화는 쉽게 이뤄지지 않고, 갈등은 쌓여만 가고 있다.

이렇게 쭉 나열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가히 ‘대화 실종 시대’라 부를 만하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 같은 사인 간에도 갈수록 대화가 사라져 간다. 더구나 요즘 같은 양극화 시대에, 서로 다른 정체성 위에서 각자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대화에서 합의를 이루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결국 갈등의 해결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 찰스 두히그는 자신의 대화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슈퍼 커뮤니케이터를 인터뷰해 ‘대화의 힘’이란 책을 썼다. 대화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설명하면서 “다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묻고, 자신이 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자신의 관점도 공유하는 것으로 응답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 경청하고, 여기서부터 의미 있는 대화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대화는 한 번의 대화로 내가 원하는 결과를 꼭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대화를 보고 싶다.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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