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목의 시선]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영화 주제가가 오랫동안 마음에 머무를 때가 있다.
‘행복의 나라’(14일 개봉) 또한 그랬다. 대통령 시해에 가담한 군인 박태주 대령(이선균)을 살리기 위한 변호사(조정석)의 노력을 그린 내용이다. 10·26에 가담했다가 사형당한 박흥주 대령(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의 실화가 배경이다.
일이 생기면 청와대 경호원들을 제압하라는 상관(중정부장)의 명령을 실행한 박 대령. ‘내란 사전 공모’냐,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이냐가 쟁점이었지만, 재판은 신군부의 각본 하에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
「 영화가 그린 야만적 시대상
청년 한대수의 꿈 또한 좌절
평화·공존의 세상 만들어가야
」
그의 마지막 진술에 마음이 아렸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묻는 군 판사에게 그는 “6사단 포병 포대장으로 근무했을 때 아내의 밥 짓는 냄새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그립다”고 말한다.
원치 않게 사복 입은 군인이 됐던 그는 최전방 전출을 줄곧 요청했지만, 역사의 비극에 휘말리며 소박한 행복을 박탈당했다. 권력 핵심에 있었지만 서울 행당동 달동네에 살 정도로 청렴했던 그는 비싼 악기를 사달라 조르는 어린 딸에게 “나라 지키는 군인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며 달래던 올곧은 군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이 세상을 떠보자~’로 시작하는 ‘행복의 나라로’(김마스타 노래)가 흘러나왔다.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고, 태양만 비치면 살겠다’는 가사가 역설적으로 빛줄기 하나 없던 당시의 엄혹한 현실을 가리키는 듯했다.
야만의 시대는 ‘행복의 나라로’의 원곡 가수 한대수(76)도 좌절케 했다. 밝고 희망찬 노래에 박정희 정권은 금지곡 딱지를 붙였다. ‘대한민국이 행복의 나라가 아니란 얘기냐’ ‘행복의 나라가 북에 있는 그곳이냐’는 이유였다. 그의 다른 명곡 ‘물 좀 주소’는 물고문 등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빨간 딱지가 붙었다.
앨범 표지에 철조망과 고무신이 담긴 2집 앨범 ‘고무신’은 분단·병영 국가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음반은 물론 마스터 테이프까지 폐기됐다. 아버지의 실종으로 조부모 손에 외롭게 자란 청년의 사랑과 좌절, 자유에의 갈망을 담은 노래는 ‘반체제’ 노래가 됐고, 가수의 꿈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생계를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행복의 나라로’ 가사를 곱씹으며 생각해봤다.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향해 가고 있나. 야만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나. “베트남전이 인류의 마지막 전쟁일 것”이라는 군 복무 시절 한대수의 기대와 달리, 전쟁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와 학살, 복수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나라 사정은 어떤가. 갈등은 정치 성향, 계층, 세대, 성별로 더욱 극심해졌고, 일자리는 물론 삶의 좌표까지 잃은 청년들의 한숨에 땅이 꺼진다. 국민을 보듬는 정치는 실종된 지 오래다.
70년대 청년 한대수를 이 땅에서 밀어낸 게 폭압적 시대상이었다면, 2016년 그를 다시 미국으로 등 떠민 건 ‘미친’ 교육 현실이다. 그는 당시 한 매체 인터뷰에서 이같이 일갈했다.
“환갑에 애를 낳으니까 교육 시스템을 보게 되더라. 초등학교가 1년에 2000만원, 3000만원 한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 그렇게 공부시켜서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 평화상 말곤 없잖아.”
초등생 의대 입시반까지 생긴 작금의 현실을 보면, 미국에 있는 그가 뭐라 할까. 뉴욕에서 17세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그는 작년 말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을 냈다. 그의 렌즈는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있었다. 노인, 도시 빈민, 거리의 악사, 노숙자, 천진난만한 아이들, 반전 시위자들….
그는 당시 본지 인터뷰에서 “똑같은 아름다운 꿈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이 슬프다”고 개탄했다. 학살, 인권 유린에 침묵하는 것도 범죄라고 믿는 그는 늘 사람들에게 촉구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고함치며 항의하라고.
‘영원한 히피’ 한대수의 딸 이름은 양호다. ‘양호(良好)’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작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양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라 했다. 지난 6월 그가 아내 옥사나의 장례식에서 외친 말은 “No More War! Peace!”(전쟁 종식! 평화!)였다.
‘행복의 나라로’가 발표된 지 반세기를 훌쩍 넘었어도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는 건, 평화와 공존에 여전히 목마른 현실 때문 아닐까. 한대수가 지금도 간절히 바라는 ‘행복의 나라’는 저 먼 곳의 이상향이 아닌, 지금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나라일 것이다.
정현목 문화부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8만원 료칸, 72만원 이겼다…일본 가성비 갑 온천은 여기 | 중앙일보
- "마약∙성관계해야 돈…여긴 동물의 왕국" 여성 BJ 충격 폭로 | 중앙일보
- "회식 불참, 돈으로 주세요"…이런 MZ에 쓸 '말발의 기술' | 중앙일보
- '숲속마을 출신' 베트남 여성, 교수됐다…31세에 이룬 '코리안 드림' | 중앙일보
- "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 박근혜가 밝힌 '세월호 7시간' | 중앙일보
- "성 충동 들면 같이 배드민턴 쳐라"…조롱거리 된 홍콩 성교육 교재 | 중앙일보
- 4년전 영끌은 '노도강' 이젠 '마용성'…10억 빚내 집사는 2030 | 중앙일보
- "병원서 내 난자 유출한 듯"…딸과 닮은 미아 소녀에 충격 | 중앙일보
- 50대 션, 몸 상태 어떻길래…"이런 사람 본 적 없어" 의사도 깜짝 | 중앙일보
- "이코노미 좁다, 일등석 앉겠다"…이륙 지연시킨 中 모자 난동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