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된장잠자리와 원자탄

2024. 8. 2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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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식 수필가

지난주 백제 미륵사지 터에 세워진 국립익산박물관을 들렀다. 멀리 미륵산을 병풍으로 두른 잔디밭에 세워진 미륵사지석탑은 늦여름 석양 속에 천 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무언으로 설명한다. 사뭇 감상에 젖은 나그네에게 귀갓길을 재촉한 것은 잔디밭 위를 여유 있게 날다 해가 기울자 갑자기 분주해진 된장잠자리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잠자리는 우리의 추억 속에 늘 같이 있었다. 빨랫줄에 앉은 쌀잠자리, 상추꽃대 위의 보리잠자리, 초가을 볕에 말리는 고추와 나락 위를 나는 된장잠자리, 아침 햇살 가득한 장독대에 앉아 날개를 말리는 고추잠자리, 연못가에서 몸을 바르르 떨다 수초줄기에 몸을 붙이는 실잠자리는 언제 보아도 정겹다. 우리는 집 주변에 사는 잠자리들을 토종 식재료 이름에 따라 쌀잠자리, 보리잠자리, 밀잠자리, 된장잠자리, 고추잠자리라고 불러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 세계 어디서나 만나는 잠자리
소식 전하려는 듯 공중 날아다녀
히로시마 된장잠자리 기억 뚜렷

김지윤 기자

잠자리는 물에서 자라 땅으로 나와 하늘을 비상한다. 잠자리 유충은 물속에서 살면서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를 잡아먹다가 성충인 잠자리가 되면 모기나 진딧물 같은 해충을 잡아먹어 우리에게 넉넉한 농작물을 선사한다. 우리는 잠자리가 주는 혜택만 누려 온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지만 오랫동안 헌신한 잠자리에게 애정과 호감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어린 시절, 여름철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잠자리를 잡아 관찰하거나 장난감 삼아서 놀았다. 잠자리는 아름다운 금빛의 눈과 비단 같은 얇은 날개를 가진 데다 냄새도 나지 않아서 놀기에는 더없이 좋은 곤충이었다. 잠자리를 잡아 손가락 사이에 날개를 끼웠다 풀어주면 잠자리는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또 잠자리의 발이나 꼬리 부분을 가는 실로 묶어 지치게 날게 하다 땅바닥에 뒹굴게 하기도 했다. 쓰러진 잠자리의 날개는 어김없이 부서지고 헤졌다. 잠자리를 죽일 의도까지는 없었기에 허무하게 죽은 잠자리가 야속하기도 했다.

뛰어난 눈과 비행능력을 가진 잠자리지만 날개는 속이 비치는 ‘시스루(see through)천’처럼 얇고 연약하다. 네 장의 잠자리 날개에는 미세한 양의 피가 흐르는 까만 색의 가는 시맥(翅脈)이 펼쳐져 있다. 변온동물인 잠자리는 아침 햇볕으로 시맥을 따뜻하게 데워야만 활동 에너지가 나오고 짝짓기도 할 수 있다. 시맥이 상한 잠자리는 맥을 못 추다가 죽고 만다. 아름다운 잠자리 날개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나의 무지로 인해 죽었던 잠자리들에게 몹시 미안했다.

어른이 돼 마주한 잠자리 또한 어디서 만나든 반갑다. 경원선 철도 중단점인 신탄리역 ‘정지’ 표지판 위에 내려앉은 고추잠자리, 중국 길림성 장춘시 교외를 유유히 나는 된장잠자리, 일본 아오모리 부근 시골 개울가에서 만난 장수잠자리 역시 모두 원초적 반가움을 선사한다. 파리 에펠탑 주변 관광객들과 아프리카에서 온 좌판 상인들 위를 유영하는 밀잠자리…. 아~, 너희가 여기에도 있구나! 이 잠자리들 덕에 잠시 이국의 낯섦을 잊는다.

여러 곳에서 본 잠자리 중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는 잠자리는 몇 년 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주변 잔디밭 위를 날던 된장잠자리다. 기념관은 원자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시 중심 건물에 세워져 있다. 그 주변에서 본 잠자리가 머릿속에 남는 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멈춰진 채로 기념관에 전시된 낡은 회중시계와 그 옆에 놓인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글귀 때문이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더니 담장 위에 앉았다. 내가 일어서서, 모자를 벗어 잠자리를 잡으려는 순간…(원자탄이 터졌다)”

원자탄이 터지던 그 날 아침 히로시마 상공은 구름이 끼고 습했다. 날개에 평소보다 습기가 많이 묻은 된장잠자리들은 저공비행을 했고, 된장잠자리를 먹이로 하는 제비 역시 낮게 날았다. 지금도 히로시마의 노인들은 잠자리나 제비가 낮게 난다는 말만 들어도 긴장한다고 한다.

잠자리가 공중을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뭔가 소식을 전하려는 전령의 모습이다. 그래서 잠자리는 청정(蜻蜓)이라는 한자 이름 외에도 ‘알리다’는 의미의 영(令)자를 붙여 청령(蜻蛉)으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 히로시마 상공을 분주히 날던 된장잠자리들은 어떤 소식을 전하려 했던 것일까.

히로시마 된장잠자리들이 떠난 지 80년 가까운 오늘, 긴 여름을 마무리하려는 된장잠자리들이 서울 북쪽 마을의 상공을 유유히 난다. 이들이 떠나면 논에는 벼 이삭이 패고 과수원의 머루 포도는 단내를 풍길 것이다. 농부들에게는 이때부터 추석까지가 느긋한 시간이지만 올해는 어쩐지 마음이 한갓지지만은 않다. 나라 안팎의 어수선한 소식 속에 북한은 오물풍선까지 날려 보냈다. 우리의 오랜 친구 된장잠자리를 보며 히로시마 원자탄을 생각하다 북한의 오물풍선과 그들의 미사일까지 떠올리는 것은 과민한 탓일까?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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