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간첩이자 원폭피해자였던 동네 삼춘 김양진

김순애 2024. 8. 2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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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국가 폭력,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요

[김순애 기자]

4월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자 친구는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재심 결정 나서 연락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같은 동네에서 같이 나고 자랐던 친구의 아버지이면서 나와는 먼 친척뻘인 동네 삼춘(제주 방언) 김양진은 조작 간첩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4월 16일 제76차 위원회를 열어서 김양진의 '1964년 반공법 위반 불법 구금 등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한다며 진실 규명을 결정했다. 또한 국가에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 친구의 아버지이자 동네 삼춘, 김양진 .사진은 2년 전 그의 자택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찍었다.
ⓒ 김순애
어른들은 그가 일본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의 아버지가 조작간첩이었다는 사실을 2년 전에야 알았다. 엄마를 시작으로 오도롱 어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와중에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유년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동네에서 삼춘을 보았던 기억은 없다. 어른들은 그가 일본에서 일하고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당시 일본에서 일하는 친인척이 돈을 보내오는 경우가 제주에서는 드물지 않았던 터라 나는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조작간첩으로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던 삼춘은 내가 마을을 떠나 시내로 이사했던 1988년에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러 주말에 고향 마을을 방문했었고 그 때마다 밭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그의 밭은 그리 넓지 않은데다 길보다 지대가 높았기에 나의 시선과 그가 땅에 엎드려 일하는 모습은 같은 높이였다.

엄마는 그에 대해 "자기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말했다. 농사를 지을 때 주변 조언을 듣기보다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손해를 본 적이 더러 있어도 그 고집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내가 태어난 그 곳 오도롱(행정동은 이호 2동이다)에 살고 있다. 그의 고향 역시 오도롱이다.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오랜 기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아 평범하게 살던 도중 간첩으로 내몰려 잡혀갔다.
▲ 김양진이 살고 있는 마을, 오도롱 .
ⓒ 김순애
다섯 살에 어머니와 형을 따라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에 태어난 그는 다섯 살 즈음 어머니와 형을 따라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당시 오도롱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들이 많았다. 1923년 제주와 오사카의 직항로가 개설되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제주도민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그 수가 5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제주도 인구 네 명 중 한 명 꼴이었다. 김양진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가 바로 그 즈음이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구두공으로 자리를 잡은 후 남은 가족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김양진은 커다란 목조 주택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주로 조선인들이 많았다. 곧 일본 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배웠는데 학교에서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던 그는 빠르게 일본 사회에 적응했다.

"어릴 때 빈민가에 살 때 일본 아이가 대장질을 하면서 조무래기들 모아놓고 너 저거 가져와라, 저거 훔쳐 와라 지시했어. 지시에 따라 행동하면 대장은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먹을 거라도 주고 했는데 그 행동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동네에 떠도는 개들을 잡아오면 죽이고 처분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개를 잡으면 목줄 같은 것을 빼두거든. 대장이 그걸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거야. 몇 번 그걸 하다가 한 번을 들켰어. 어른이 막 화를 내면서 쫓아왔는데 잡히지 않고 열심히 논을 가로질러서 도망갔어. 그 어른이 따라오지 못하고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일본말로 '백정아, 나 잡아봐라' 그렇게 놀린 거야. 지금 생각하면 내가 못된 아이였지. 그래서 나중에 고향 와서 수박 참외 키울 때 서리하는 아이들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크게 혼을 내지 못했어."

그가 기억하는 일본의 유년기 시절은 불행하지 않았다. 그는 장난을 잘 쳤고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보다 세 살 많은 형의 영향이 컸는데 형은 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었다. 하루는 형의 책장에 꽂혀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는데 또래들이 읽던 책과는 달라 그는 신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형의 책을 몰래 읽다가 형에게 들켰을 때 형이 '이 책이 이해가 되냐?' 묻자 그는 '이해는 안되지만 재밌다'고 답했다. 그 때부터 그는 형의 서가에 있는 책을 당당히 보게 되었고 또래들이 읽는 동화책이 시시하게만 여겨졌다.

책을 좋아하고 임기응변이 좋았던 유년시절

입담이 좋았던 그는 읽은 책의 줄거리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고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소풍 때도 친구들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면 이야기를 들려주고 도시락을 얻어먹곤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형의 책장에서 읽은 책에서 나온 터라 친구들은 새로워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잔머리 임기응변이 좋았어. 성격이 활발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지. 그 때는 세상이 다 내 거라는 생각으로 살았어. 아버지 벌이가 별로 없어서 생활은 가난했지만 마음의 어려움은 없던 세월이었어."

마음의 어려움 없이 긍정적이며 개구쟁이였던 그는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을 보태야 했다. 그는 구두공이었던 아버지가 다녔던 공장에 가서 심부름을 하면서 용돈 정도 돈을 벌었다. 공장과 집까지 거리는 6~7km 정도 거리였지만 전차를 타고 다닐 형편은 아니었다. 가끔 길에 떨어져 있던 전차표를 주워 전차를 타고 오는 날은 횡재한 날이었다.

군화를 만들었던 공장은 토요일에 허접한 가루를 모아 만든 빵을 배급했는데 어떤 이들은 '돼지도 안 먹는다'며 빵을 먹지 않고 그에게 주었다. 그는 '고맙습니다' 절하며 받은 빵들을 모아 집으로 가져가 동생들에게 주었고 동생들은 그가 빵을 가지고 올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때로는 집으로 오는 길에 배고픔을 못이긴 그가 하나 정도 빵에 손을 댔다가 모조리 먹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빵을 기다리는 동생들이 그를 원망하며 덤벼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죄와 벌> 등을 읽었던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다리 난간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저 깨끗한 물 속에 첨벙 들어가면 고통은 금방 끝날 건데...'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하지만 남동생과 여동생의 모습이 그를 잡아 끌었다. 마냥 개구쟁이였던 그는 차츰 삶의 고달픔에 대해 알아갔다.
▲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김양진의 재심을 권고했다 .
ⓒ 제주MBC영상 갈무리
인생을 근원적으로 뒤흔든 사건, 원자폭탄 투하

하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순간은 1945년 8월 6일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근원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의 아버지는 긴 병을 앓다가 1945년 6월에 사망했다. 당시 오사카에 살고 있던 그의 누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5월에 딸을 낳았다. 누님은 딸을 낳고 몸이 좀 안정되자 갓 태어난 딸과 다섯 살 아들, 남편과 함께 친정인 히로시마에 와서 며칠 머물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 그의 어머니는 갓 태어난 외손녀를 품에 안고 딸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도 그 곁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집이 무너져 내렸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떠보니 무너진 집의 기둥이 그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의 눈 앞에는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은 그대로 그의 어머니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된 조카는 죽어가는 외할머니 품 안에서 낯선 공포에 까무러칠 듯 울어댔다. 발가벗고 뛰놀던 다섯 살 조카는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로 바로 숨을 거두었다. 누님은 어머님 품에서 악쓰며 울고 있는 딸을 등에 들쳐 없고 피로 범벅된 남편의 몸을 잔해 더미에서 끄집어내려 안간힘을 다하여 울부짖었다.

"아이고, 우리 아이가 죽었구나. 아이고 우리 남편..."

의식을 찾은 그는 울부짖는 누님을 향해 가까스로 소리를 냈다.

"누님, 나 살려주시오 나 살려주시오."

하지만 순식간에 어머니와 아들이 바로 눈 앞에서 죽었고 남편은 의식을 잃고 잔해 속에 파묻혀버린 상황에서 그의 누님은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계속 '누님 물, 나 살려줘' 애타게 외쳤지만 누님은 남편을 먼저 안전한 곳에 옮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남편의 몸뚱이를 질질 끌며 길가로 옮겨갔다.

그는 누님의 도움을 포기하고 혼자 잔해 더미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때 동네 반장이었던 일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두수리공이었던 반장은 아침에 구두를 수리하다가 별안간 원폭이 터지자 밖에 나간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구두수리공 일본인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외쳤다. 반장의 몸에도 여기저기 유리 파편이 박혀있었지만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고 그에게 달려와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나무를 치워주었다.

"히로시마에 조선인하고 제주 사람이 많이 살았어. 그 때 집이란 집은 다 무너졌어. 모조리 드러누워 버렸지. 나는 간신히 동네 사람 도움으로 빠져나오긴 했는데 누님이 사라져버렸어. 그래서 누님을 찾으려고 히로시마에 있는 병원들을 모두 찾아다녔지. 나중에 알고 보니 출동한 군대가 누님과 매형을 싣고 병원에 데리고 간 거야. 그리고 오사카의 매형 친척들이 그 소식을 어떻게 알고 누님 식구들을 오사카로 데리고 가버렸지. 나중에 누님과 연락이 닿아서 행방불명된 동생들을 찾으러 다녔는데 생사와 행방을 확인할 수 없었어. 동생들은 그때 학교에 가서 집에 없었는데 참변을 당한거지. 그렇게 나는 원폭으로 어머니하고 동생 둘, 조카를 잃었어. 매형은 간신히 살아나긴 했지만 얼굴과 온 몸에 유리가 박혔던 자국이 남아서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어."
▲ 8월6일 원폭투하 후 히로시마 전경 .
ⓒ U.S. National Archive
오늘 밤 눈을 감고 자면 내일은 눈을 뜰 수 있을까

피폭되고 나서 1주일 정도 후에 그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빨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더니 잇몸에서 피가 계속 나기 시작했다. 열다섯이었던 그는 피폭 후유증으로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매일 같이 죽을 날을 앞둔 마음으로 살았다.

"오늘 밤 눈을 감고 잠을 자면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매일 같이 했어. 열다섯 한참 예민한 시기에 그런 생각에 휩싸이니 굉장히 외향적이었던 성격이 정반대가 되어버렸어. 그날 사건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를 완전히 망가뜨렸어. 나는 그 때부터 왜 사는가?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되었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군사도시로 성장한 히로시마는 전쟁과 함께 군수 도시로 호황을 누렸다. 1938년 도요코교(동양공업)주식회사,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히로시마기계제작소 등 군수 공장들이 잇따라 건설되었고 조선에서 값싼 노동력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동원돼 히로시마로 몰려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히로시마의 조선인 인구가 이전보다 11.8배 증가해 1945년에는 8만 4886 명이었다. 이들 중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5만 명의 조선인이 피폭되고, 3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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