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들'의 시간, 정치의 답할 책무
22대 국회가 개원했습니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읍소하며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이 과연 유권자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안 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니까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의 시각에서 22대 국회와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기자말>
[서복경]
▲ ▲ 중꺾정 -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 |
ⓒ 참여연대 |
"차지철 스타일의 야당 '입틀막' 국방부장관으로의 갑작스러운 교체와 대통령의 뜬금없는 반국가 세력 발언으로 이어지는 최근 정권 흐름의 핵심은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작전이라는 것이 저의 근거 있는 확신… 탄핵 국면에 대비한 계엄령 빌드업 불장난을 포기하기 바랍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2024.08.21.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 모두발언)
가히 음모론'들'의 시간이다. 음모론이란, 설명하고자 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모종의 음모의 결과로 인식하고 그 배후를 찾으려 하는 경향 혹은 이론을 말한다. 여러 사건을 두고 다양한 음모론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이 현재 정치 상황의 한 특성을 구성한다. 8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중 일부가 현재 난무하는 음모론의 한 줄기를 구성한다면, 또 다른 한 줄기는 8월 21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있었던 김민석 최고위원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19일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 암약하는 반국가세력들'에 대해 언급했다. 대통령의 '반국가세력' 언급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그는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가 정의한 '반국가세력'이 누구인지,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밝힌 바가 없다. 헌법수호의 책임이 있는 대통령으로서, '반국가세력'을 찾아 적법한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반복적으로 정의할 뿐이다. 왜 그럴까?
대통령의 이 행위는 전형적인 음모론자의 전략에 해당한다. 음모론자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비판이나 의혹에 직면할 때, 책임 있는 해명이나 근거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음모론을 제기함으로써 비판과 의혹 제기를 무력화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에 불법 외압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예, 아니오' 둘 중 하나이고, 아니라면 불법 외압 행사 의혹들에 대한 반박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이 근거를 제시하는 대신, '반국가세력의 선전선동'이라고 답한다면 이건 '낙인찍기' 방법이다. '너는 반국가세력의 일원이고 너의 의혹 제기는 국론 분열을 목적으로 한 선전선동'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함으로써, 의혹 제기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혹은 질문한 누군가에게 '너 반국가세력이지?'라고 되물으면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는 전략일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주요 국정의제에 대한 질문과 의혹들에 대해서 동일한 방법으로 대응해 왔다. '정부가 일본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방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오염수가 안전하다고 믿는 과학적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세력 그리고 반국가세력은 반일감정을 선동'하고 있다고 답했다.(윤석열 대통령, 2023. 09. 01. 국립외교원 60돌 기념축사)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반대하고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했던 광복회 회장은 '대통령과 정부가 일제강점의 역사를 무력화하고 일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련의 기획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광복회에 대한 보훈부의 감사였다.
21일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의 '계엄령' 발언도 음모론이다. 그는 8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에 지명한 사실과 '반국가세력' 발언 등을 근거로, 정권 핵심 세력들이 '대통령 탄핵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 발언이 음모론인 이유는 그가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에 대한 적법하거나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왜 그랬을까?
음모론에 대한 한 연구에 의하면, 음모론은 '통치 음모론'과 '저항 음모론'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통치의 수단으로도 약자의 무기로도 활용될 수 있다.(전상진, 2014, <음모론의 시대>). 공적 공간에서 권력을 비판하고 책임을 물을 방법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음모론은 저항자의 유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음모론은 결코 올바른 답을 제공해 줄 수 없지만, 설명되지 않는 정치사회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
음모론의 출발은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는 의심이다. 지금 대통령과 현 정부가 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은 이런 의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독립기념관장 등의 직위에 반헌법적 인식을 공공연히 공표해 온 인사들을 임명한 것이 그저 우연일 수는 없다는 의심, 우연히 전쟁기념관과 서울시내 6곳의 지하철역에서 독도 조형물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는 의심, '독도는 분쟁영토'라는 발언을 국회에서까지 서슴없이 했던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고 장관 재임시절 군 정신교육 교재에 독도를 분쟁지로 명시해 사회적 공분을 샀음에도 그를 유임시켰으며 결국 국가안보실장에까지 임명하는 행위가 어떤 목적이 없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다는 의심, 채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관련 '800-7070' 전화번호 소재 기관의 기관장이자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과잉경호 논란을 빚었던 사람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 의도된 계획의 일단이라는 의심, '한미일 동맹'이라는 용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이, 일본 자위대와 정기적 교류 및 합동훈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국방부의 행위가 그저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의심…
이 중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과 현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합리적 답변을 들을 수 없다. 법적 근거도 없이 밝힐 수 없다는 '국가기밀'들이 넘쳐난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자료를 요구받거나 청문회에서 답변을 요구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은 야당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토양이 된다. 이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과 정부의 행위에 대해 '대체 왜 그러는 걸까?'라는 질문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각자 혹은 끼리끼리 모여 '밀정 때문이다, V0 때문이다'라는 음모론도 일상이 되었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건 '선전선동을 일삼는 반국가세력' 때문이 아니라 정당한 질문에 대해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는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들의 질문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답변을 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음모론을 앞세워 사태를 모면하려 함으로써 전사회적으로 음모론을 확신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김민석 의원의 '계엄령' 음모론에 대해 비판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음모론이지만 대통령과 이 정부로부터 무엇하나 명료히 답을 들을 수 없는 나를 비롯한 대다수 시민들의 입장에서, 이 정부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0.1%의 가능성만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막아야 하는 중대 사태와 관련된 음모론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복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이 작성했습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와 슬로우뉴스에도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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