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정반대... 역사 왜곡해 만든 영화, 아카데미 휩쓸다

안치용 2024. 8. 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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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글래디에이터>

[안치용 기자]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러셀 크로우가 주연해 2000년에 개봉한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이듬해 열린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의상상, 시각효과상, 음향상을 받았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하고 화제를 모았으며 스콧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리들리 스콧은 왜 사실(史實)을 비틀었을까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흥행실적에서 알 수 있듯 오락영화로선 고전급이다. 스토리와 영상, 재현 등을 재미의 관점으로 보면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영화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과거 로마사에 실존한 인물이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이름과 지위 등을 빼곤 거의 허구다. 스콧 감독은 로마사를 전공한 학자들에게서 조언을 받았으나, 정작 영화를 만들 때는 무시했다. 자문한 역사학자들은 스콧 감독이 자문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자문단 중 어느 저명한 교수가 엔딩 크레딧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이 영화의 역사 왜곡이 심각했다.

영화는 로마군이 게르만족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30대 중반의 한창 때인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주인공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는, 로마의 현인 황제로 통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리처드 해리스)와 함께 전장을 누빈 명장.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막시무스가 또 다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전투에서 승리한 막시무스는 죽음을 앞둔 아우렐리우스 황제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돼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더불어 황제가 되거든 공화제를 복원해 로마를 시민에게 돌려주라고 막시무스에게 요청한다.
  글래디에이터
ⓒ CJ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막시무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계획은 무산된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자 강력한 후계자로 여겨진 콤모두스(호아킨 피닉스)가, 아버지의 계획을 전해 듣고는 부황을 살해하고 자신이 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병사(病死)가 아니라 시해임을 짐작한 막시무스는 군사를 일으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콤모두스의 '선빵'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벗어나 고향에 도착한 막시무스는 아내와 아들이 콤모두스가 보낸 군사들에 처참히 살해된 모습을 보며 오열한다. 이후 노예로 전락했다가 검투사가 돼 콤모두스와 검투를 벌여 복수하고 공화정을 복원하며 영화가 끝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 영화는 거의 허구다. 영화에서는 아우렐리우스가 막시무스를 친아들인 콤모두스보다 훨씬 더 사랑한 것으로 그려진다. 콤모두스 또한 인간말종이자 무능한 인물로 나타난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매우 사랑했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사망한 후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콤모두스는 즉위 전에 오랫동안 공인된 제국의 후계자였으며 후계자로서 특별히 흠결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중평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관계에 문제가 있지 않았고 애정 결핍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한심한 인간이 아니었다. 막시무스 또한 제위를 물려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고 검투사가 되지도 않았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영화의 결말과 같은 죽음을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리들리 스콧은 왜 이런 역사 왜곡을 감행했을까. 막시무스엔 덧셈을 콤모두스에는 뺄셈을, 그것도 심하게 해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두 사람의 실제 모습이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스콧 감독은 역사와 다르지만 대중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를 과감하게 창안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다. 두 사람은 선과 악 각각의 화신으로, 할리우드식 일도양단의 구분과 대결의 양상을 보여준다. 부친살해자이자 황위찬탈자인 현 황제에, 황위를 빼앗기고 가족까지 살해당한 채 노예로 전락한 검투사가 맞서 복수하고 정의를 이루는 스토리.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주었고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지, 즉 공화제를 복원하라는 유지까지 받들며 죽는 완벽한 영웅서사다.
  글래디에이터
ⓒ CJ 엔터테인먼트
그리스 비극 영웅의 모습이 <글래디에이터>에서 분열된다.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의 코드가 콤모두스의 캐릭터에 나타난다면 영웅적 숭고함과 무결함, 그리고 업적은 막시무스라는 캐릭터에 전가된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웅서사의 성격상 어느 정도 해피엔딩의 요소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콤모두스에 작동한 신화소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이 자신의 의지나 인지와 무관하게 운명이나 신의 농간에 의해 부친살해 같은 금단의 행위를 한 반면, 콤모두스는 명백한 자신의 의지로, 또 악의 의지로 행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운명에 끌려 들어간 모습은 막시무스에게 할당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후계자가 되는 등 소박한 자신의 꿈과 다른 길을, 오직 운명에 의해 막시무스가 걷는다.

리들리 스콧은 역사 왜곡을 통해 영화적으로 매력 있는 두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그런 식으로 그리스 비극의 도식은 할리우드 흥행 문법으로 기묘하게 변용된다.

로맨스

선과 악의 대결 구도와 함께 이런 유의 영화에서 로맨스가 빠질 수 없다. 아우렐리우스의 딸이자 콤모두스의 누나인 루실라(코니 닐슨)와 막시무스 사이에 로맨스가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여기에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이 개입하며 사랑 또한 선과 악의 진영으로 양분된다. 콤모두스와 막시무스는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을 두고 경쟁한 데 이어 그의 딸의 사랑을 두고도 싸운다. 승패는 영화의 구상 시점에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 루실라가 사랑한 사람이 콤모두스가 아니라 막시무스인 것이 아닌 스토리는 불가능하다.
  글래디에이터
ⓒ CJ 엔터테인먼트
루실라는 정치적인 수완과 현실주의 성향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선량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사악한 동생으로부터 루시우스라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막시무스를 궁지로 몰긴 하지만, 그런 선택이 불가피했으며 와중에 막시무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아버지와 연인의 유지를 실천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로마 역사에서 실제 루실라는 권력욕에 사로잡혀선 원로원과 결탁해 남동생 콤모두스를 살해하려 한 사악한 인물이다.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게 루실라라고 본다. 루실라의 암살 기도가 콤모두스를 광포한 황제로 만든 것이 현실의 역사라면 영화에서는 루실라가 폭군 콤모두스에게 핍박당하는 인물로, 정반대로 그려진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용인될 수 있을까. 당대나 아직 가치평가가 필요한 시기의 역사라면 어떤 명분이든 심각한 역사 왜곡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끝났고 이해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오랜 과거의 역사는 영화를 포함하여 예술적 가공이 가능하다. 예술적 왜곡이 대중 인식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역사 왜곡에는 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들리 스콧의 왜곡은 창의성의 발현으로 보아 무방하다.

대미

결말의 콜로세움 결투 장면 또한 당연히 허구다. 다만 콤모두스가 뛰어난 검투사였던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루실라를 비롯해 몇 차례 암살 기도 후 콤모두스는 공포와 강박, 분노조절 실패, 의심 등 정신적으로 좌초 상태에 빠졌다.

이에 따라 황제는 공식 업무와 노출을 피한 채 은밀한 곳에서 검투사로서 훈련하고 나머지 시간엔 주지육림에 빠져 지내게 된다. 그의 검투 사랑은 대단한 것이었고 또한 정신적 불안과 더불어 과대망상과 잔혹이 갈수록 심해져, 재위 마지막 해인 192년에 그의 광기가 극단으로 발휘됐다.

콤모두스의 죽음은 영화보다 훨씬 못한 모습으로 허망하게 찾아왔다. 근위대장과 애첩이 황제의 레슬링 교관과 짜고 콤모두스를 살해했는데, 음식에 독을 타서 죽이려던 첫 독살 시도가 실패하고, 독을 먹고 욕실에서 토하는 콤모두스를 레슬링 교관이 목을 졸라 죽이게 된다. 콤모두스가 근위대장과 애첩을 단지 변덕에서 죽이려 들자 이들이 살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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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J 엔터테인먼트
수미상관의 엘리시온

영화의 앞과 뒤에 막시무스가 밀밭을 거니는 평화롭고 몽환적인 장면이 나온다. 간접적 해피엔딩으로, 그곳은 엘리시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천국에 해당하는 사후세계를 엘리시온(Ἠλύσιον)으로 불렀다. 주로 평원으로 그려졌으며 라틴어에서는 엘리시움(Elysium)으로 불렀다. 하데스의 지하세계와 함께 사후세계를 양분하며 영웅이나 선행한 자 등 자격을 갖춘 자가 엘리시온으로 갔다.

"너희들이 만약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너른 평원이 펼쳐지고 따사로운 태양 아래서 달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놀라거나 겁먹지 마라.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엘리시온이고 너희들은 이미 죽은 것이니까."

영화 앞부분에서 전투를 앞두고 막시무스가 부하들을 격려하며 한 말이다. 번역은 '천국'으로 돼 있으나 실제 대사는 '엘리시온'이고 대사에 평원(Field)란 말도 나온다. 밀밭 장면을 앞뒤에 배치함으로써 리들리 스콧은 막시무스의 영웅서사를 남몰래 완결한다.

스콧 감독은 곧 개봉하는 <글래디에이터 2>에선 어떤 영웅서사를 준비했을까.

안치용 영화평론가

►유튜브 영상 보기 https://youtu.be/uTKWvYeezwc?si=7kFGPGfpkObL0V5Q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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