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티'는 성공했지만 '유토피아'는 실패한 건축의 거장

이정희 2024. 8. 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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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4 상영작]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

제 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32개국 53편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작품 중 눈에 띄는 다큐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이정희 기자]

다큐멘터리의 대중화를 위해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된 EIDF(EBS국제다큐영화제)가 19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 동안 온·오프라인 상영관을 통해 전 세계 70여 편의 다큐를 선보인다.

'시대에 다리를 놓다'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영화제에선 장편 경쟁 부분 11편을 비롯해 ▲단편화첩 ▲기억의 징검다리 ▲예술가의 초상 ▲자연과 인간 ▲이슈 포커스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보여주는 중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 스틸컷
ⓒ EIDF
이중 '예술가의 초상'은 예술가 본인은 물론 주변인물, 전문가의 다층적인 목소리를 통해 예술가의 모습을 완성해 가는 부문이다. 올해는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가 출품됐다.

르 코르뷔지에란 이름은 건축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건축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이 아닐까. 가장 대표적인 현대 건축 거장 중 한 명이니 말이다. 개방된 일층을 뜻하는 필로티, 옥상정원, 수평창 등 오늘날 현대 건축에서 보편이 된 개념을 연 인물이다.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그의 사상이 녹아든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 마르세유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비롯해 롱샹 성당, 리옹의 라 투레트 수도원이 대표작들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르 코르뷔지에, 그런데 그의 일생일대의 역작은 뜻밖에도 이역만리 인도에 있다. 그것도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도시 찬디가르가 그곳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는 바로 서방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동양의 도시 인도 찬디가르에 펼쳐보인 사상과 궤적의 역사를 추적한다.

위대한 실험, 찬디가르

1947년 인도는 해방됐다. 하지만 힌두교, 시크교 등의 종교로 국가는 갈라졌고,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100만 명이 목숨을 잃으며, 1500만 명의 집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메마른 땅과 고갈된 들판뿐. 오랫동안 간디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자와할랄 네루가 수상이 됐다. 네루는 그가 꿈꾸는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에 걸맞는 신도시로서의 수도를 만들겠다는 꿈을 꿨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 걸맞은 건축가로 르 코르뷔지에를 초빙했다.

1952년 모든 것을 철거하고 '무'에서 시작한 르 코르뷔지에는 더 공정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의 생각을 도시로 풀어 내고자 했다. 우선 히말라야 산기슭에 자연과 하나되는 거대한 호수를 조성했다. '웅장한 하늘 아래 펼쳐진 조용하고 조용하게 느리게, 조화롭고 부드러운'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그의 역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름다운 도시에는 많은 공원이 있다. 1/3이 나무다. 도시의 건물은 나무와 공존한다. 아예 법으로 벌목을 금지하고, 건물조차 나무를 감싸도록 정했다. 어디 자연뿐일까. 도시는 보행자 중심으로 건설됐다. 도보가 거리 측정의 기준이 됐다. 또한 4개의 큰 도로는 분홍, 노랑, 보라 등의 꽃 색깔로 구분지어진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 스틸컷
ⓒ EIDF
도시의 주택은 벽돌을 사용해 탁 트인 공간을 만들었다. 가로세로 벽돌로 이루어진 벽, 그 사이의 틈, 인도 특유의 덥고 습한 기후에 맞춰 차단하지만 바람은 통할 수 있는 인간 중심 설계의 주택이 만들어 졌다. 거기에 '르 코르뷔지에 칙령'까지 만들어 고밀도를 방지, 개인의 변덕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고자 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현대 도시는 산업도시가 아니다. 물질의 세상이 되는 도시 대신, 극장, 대학, 박물관 양질의 교육과 문화가 제공될 수 있는 도시를 지향했다. 그래서일까. 찬디가르는 관료들의 도시라는 비아냥이 무색하게 많은 예술가, 비평가, 작가들의 도시가 됐다.

도시는 그저 건축의 공간이 아니다. 도시가 품은 사고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52개의 구획, 7단계의 도로 체계를 통해 원활한 교통 체계를 만들어 낸 반면, 주택가는 조용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공원에 나와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 스틸컷
ⓒ EIDF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유토피아> 스틸컷
ⓒ EIDF
안타깝게도 르 코르뷔지에는 모든 계층을 위한 사회적 실험을 꿈꾸었지만, 현재부익부 빈익빈의 도시가 됐다. 저소득층들은 도시 외곽에 빈민가를 형성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상징이 된 정부 청사를 아는 젊은이들은 드물다. 그가 만든 건축의 라인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세월을 피할 수 없는 시멘트 건물들은 우중충해져 간다.

1952년 '정글에 돈을 투자하다니'라며 시작된 위대하고 놀라운 실험, 그 시절 건축 과정 사진에서 여인들이 돌을 이고 지고 날라 웅장한 건축의 터를 다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 건축이 만들어 낸 유토피아는 인도에서 가장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됐고, 도시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못한 채 박물관처럼 늙어가고 있다. 유토피아가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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