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파의 죽음, 총부리 마주한 주민들... 증오의 원인은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8. 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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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싸움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불을 피우다.
ⓒ unsplash
"살미지서가 습격당했답니다."

수사과장이 숨을 헐떡이며 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빨리 출동하시오!" 경찰병력이 월악산에 인접해 있는 충주군(현재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에 소재한 살미지서로 출동했다. 이원경 서장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긴장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전부터 남로당과 빨치산이 준동하더니 가을이 되기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부가 남로당을 불법화하자 그들은 더욱 극단적 투쟁을 전개했다. 5월 10일 치러진 초대 국회의원 선거 전에는 기껏해야 봉화 시위, 삐라(전단) 살포에 그치던 것이 투표 당일에는 투표함 파손, 선거관리위원 테러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환됐다. 남로당의 봉홧불이 쉽사리 꺼질 것으로 생각한 것은 경찰서장의 오판이었다.

물론 서장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이었다. 불과 2년 전 발생한 충주의 1946년 10월 항쟁 때 인명 살상의 주 책임이 경찰과 우익단체에 있었던 사실을 말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

경찰서장이 서장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팍' 소리가 나며 형광등이 나갔다. '이게 웬 변고지?'라고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사찰과장이 뛰어 들어왔다.

"서장님. 충주가 암흑천지입니다!"

이번에는 사찰과장이 경찰병력을 인솔해 경찰서에서 불과 300~400미터 떨어져 있는 충주군 성서동의 변전소로 출동했다.

이날 저녁 충주가 암흑천지가 된 것은 월악산 빨치산 탓이다. 월악산에 있던 빨치산은 일부가 살미지서를 습격하고 일부는 충주변전소를 습격했다. 밤손님이 변전소 숙직자에게 고함쳤다. "당장 전원을 내려!" 총을 당해낼 장사는 없는 법이다.
▲ 변전소 습격상황도 월악산빨치산의 충주변전소 습격 상황도
ⓒ 네이버지도
목숨이 아까운 숙직자는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전원을 내렸다. 그 순간 충주는 암흑천지가 됐다. 잠시 후에 충주경찰서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순간 변전소에 있던 밤손님은 3개의 대열로 나뉘었다.

최소 인원만 변전소에 남았고, 일부는 시내에 있던 석유 창고로, 나머지 주된 대오는 충주경찰서로 향했다. 이렇게 대열이 나뉜 데에는 빨치산의 숨겨진 전략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날 주된 목표는 충주경찰서 무기고였다. 하지만 빈약한 화력으로 충주경찰서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날 1차로 살미지서를 공격해 충주경찰서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또한 변전소를 습격해 전원을 내린 것은 2차 타격 대상인 충주경찰서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빨치산 일부 대원들이 석유창고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석유창고에 불을 지르면 경찰이 출동할 것이고, 경찰병력이 다시 한번 분산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명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이었다.

남산의 대장간

살미지서, 변전소, 석유창고, 충주경찰서로 출동한 빨치산의 무장 수준은 형편없었다. 대원중 극소수만이 구구식 장총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는 고작 창을 죄고 있었다. 그런데 이 창은 충주 내 남산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숲이 우거지고 골짜기가 많았는데, 빨치산들은 그곳에 대장간을 만들고 비밀리에 창을 제조했던 것.

하지만 완벽해 보이기만 한 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변전소 숙직 직원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빨치산의 협박에 못 이겨 전원을 내리고 급하게 인근 밭고랑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숨어 있던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왕이면 시내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죽자.' 사실 그는 변전소 전원을 내린 것에 대한 책임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밤손님들이 자기를 해코지할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전원을 내리자 밤손님들이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모르는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는 어차피 자기가 죽을 신세이면 변전소 전원을 다시 올리고 죽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가 전원을 올린 순간, 석유 창고와 충주경찰서에 막 도착했던 밤손님들은 황망해했다. 석유 창고 방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충주경찰서 습격은 언감생심이었다.
▲ 충주경찰서 일제강점기 충주경찰서 <충주관찰지>
ⓒ 충주출판소
충주가 암흑천지가 돼서 잔뜩 긴장했던 경찰들이 사방에 불이 켜지자 경계의 눈초리를 더욱 빛냈다. 창이 총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기껏 몇 정 안 되는 총과 다수의 쇠창으로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충주경찰서에서 한참 떨어진 살미지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빨치산과 면소재지와 인근 마을에서 동원된 마을 주민들이 지서를 에워쌌다. 총과 창으로 무장한 빨치산과는 달리 마을 주민들은 양 주머니에 볼록하게 집어넣은 돌맹이가 무장의 전부였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지서를 에워싼 이들이 돌맹이를 던져 보기도 전에 충주경찰서에서 출동한 무장병력이 도착했다. 결국 GMC 트럭 불빛이 지서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빨치산들은 긴급히 후퇴해야 했다. 충주경찰서장 이원경(1948.9.25.~1949.8.5.)이 종일 넋이 나간 이 날은 1948년 10월 7일이었다.

빨치산과 토벌대

월악산 빨치산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48년 이전에 구성됐다. 1946년 말과 1947년 초의 일이다. 한수면 송계리에서는 1947년도에 마을 청년 25명이 월악산에 입산했다고 한다. 즉 서북청년회가 송계리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월악산 빨치산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점은 1948년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부터이다. 이들의 활동은 1956년까지 지속됐다. 이들은 인민군이 충주·제천을 점령하던 1950년 여름과 가을의 세 달간만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나머지 기간은 불안한 신분이었다. 집요한 군경토벌대의 공격에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도 월악산 빨치산은 충주·제천·단양 등 충북의 북부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청풍·금산의 빨치산과 경북의 산악지대에서 북상하는 빨치산들과 함께 단양 역전파출소를 습격(1949.6.10.)했다. 또한 죽령터널 습격(1949.8.16.), 단양경찰서 습격(1950.7.12.), 충주군청 습격(1952.11.3.)을 강행했다.

이에 맞서 군경토벌대가 구성됐고, 마을 단위에서는 대한청년단을 위시로 해 자위대가 구성됐다. 결국 한수면 송계리의 경우처럼 같은 마을 사람들이 한 편에서는 빨치산, 다른 한 편에서는 토벌대로 나뉘어 총을 겨누게 됐다.

시기가 불분명하지만 한국전쟁 전에 살미면 무릉리에서도 참변이 일어났다. 빨치산에 의해 두 명의 주민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중 김진갑은 자신의 문제(?)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동생 김순갑이 대한청년단 살미면 단장이라는 이유로 쇠망치로 가격당해 죽임을 당했다. 마침 동생이 집에 없어서 대신 죽임을 당했다. 그의 집은 불타버렸다.

같은날 죽임을 당한 이는 윤숙일로 독립촉성국민회 살미면 청년대장을 역임한 이다. 2008년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역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수집에서 한 증언자는 "윤숙일이 이전에 좌익들을 붙잡아다 구타를 해서 빨치산이 보복한 것"이라고 했다. 빨치산과 토벌대·자위대는 한 치 양보 없는 작은 전쟁을 치렀다.

소고기 잔치

"울 아들은 왜 안 온 겨?"
"걱정 마시래요. 남하해서 조국해방전쟁의 최선봉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또출이(가명)의 이야기를 들은 박무용(가명)의 가슴은 옥죄었다. 아들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안하거나 서운한 표정을 산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내비칠 수는 없었다.

1950년 7월 한수면 송계리에서는 난데없는 소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그동안 월악산 동굴과 비트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인민군의 남하로 송계리에 당당히 입성한 것이다.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된 송계국민학교 운동장에 솥이 내걸렸다. 여성동맹원들은 부잣집에서 강제로 끌고 온 소를 삶았다. 특히 월악산에 입산했던 집안 여성들의 몸이 분주했다. 소고기 나르랴, 하산한 이들에게 자기 가족의 안부를 물으랴.

저녁 때마다 마을 주민과 꼬맹이들이 송계국민학교 교실에 동원돼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을 배웠다. 철없는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노래를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신났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는 경북 문경에서 잡혀 온 군인이 완장 찬 이들의 노리개가 됐다. 학교 운동장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가운데에 나무를 세웠다. 국군 패잔병이 나무 기둥에 묶여 세워졌다.

"반동 간나 새끼, 노래 일발 장전!" 나무 기둥에 묶인 청년은 억지춘향격으로 울상을 지으며 노래를 했다. 완장 찬 이들이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노리개가 된 청년의 운명은 다음날 나락으로 떨어졌다. 완장 찬 이들이 팥죽거리에서 아식보 장총에 대검을 꽃아 청년의 가슴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자전거 바퀴(자료사진).
ⓒ unsplash
송계국민학교 앞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석영기의 신세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유학까지 갔다 온 그는 송계국민학교 앞에서 자전거포를 열었다.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고 마을을 수비하는 자위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가게는 인근 빨치산과 마을 정보를 수집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그런 이유로 지방 좌익의 미움을 산 그는 송계국민학교에서 공개 처형됐다.

그가 주검으로 발견된 때는 1950년 8월 7일이었다. 가족에 의해 수습된 그의 시신은 목이 잘린 상태였다. 가족들은 찰흙으로 머리를 만들어 나머지 시신과 함께 선산에 매장했다.

전향

"천식이(가명)가 자수했댜"는 소문은 며칠 만에 한수면에 파다하게 퍼졌다. 송계리 출신의 피천식은 빨치산 연락병으로 활동하다가 어느 날 심경의 변화로 자수했다. 그리고는 경찰의 권유(?)로 반공 강사로 나서게 됐다. 제천경찰서 입장에서는 입이 귀에 닿을 일이었다. 피천식은 한수면과 덕산면 등지의 장날에 반공 강사로 활약을 했다.

결국 수렁(?)에 한 발을 디디게 되면 목까지 빠지는 법이다. 이번에는 월악산 곳곳을 다니며 군경토벌대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정작 빨치산 출신이니 그들의 비트(비밀 아지트)나 투쟁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경찰에게는 귀한 존재로, 빨치산에게는 제거 대상 1순위로 인식됐다.

그런데 6.25가 터졌다. 피천식은 자신의 처지가 180도 바뀌었음을 알고 좌절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송계국민학교 운동장 가에 있던 감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인민군이 진주한 후 지방 좌익이 피천식의 어머니를 공개 총살했다.

언제부터 역사의 매듭이 꼬인 것일까? 왜 한수면 송계리 사람들끼리 총부리를 마주했을까? 그만큼 역사의 한과 증오가 깊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송계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굴절된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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