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는 어떻게 노벨문학상에 이르렀을까

김성호 2024. 8. 2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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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41] 소설 <샤이닝>

[김성호 기자]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욘 포세였다. 수상작이 발표되면 늘 그러하듯 포세의 소설 읽기 열풍이 이어졌다. 어디까지나 이제는 마니악하다 해도 좋을 독서가들 사이에서의 열풍이었다지만.

가장 많이 읽힌 건 두 권이다. 하나는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아침 그리고 저녁>, 또 다른 하나가 신작 <샤이닝>이다. 두 작품이 주로 읽히는 덴 분명한 이유가 있다. 두 권 모두 한두 시간이면 금세 끝을 볼 수 있는 단편이란 점이 결정적 이유가 됐을 터다.

<샤이닝>은 노벨문학상 수상 뒤 발간된 최신작이다(2024년 3월 출간). 포세 특유의 특징, 문장부호를 파괴하는 독특한 스타일이며 죽음과 내세, 신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성 또한 갖췄다. 말하자면 책 한 권 읽는 것만으로도 포세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를 이해하기 좋다는 뜻이겠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 7p

줄거리는 이렇다. 화자는 뭐랄까 즐거운 기분으로 집을 나서 운전을 한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도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루함에 사로잡힌다. 왼쪽으로, 다음 갈림길에선 오른쪽으로, 그 다음엔 다시 왼쪽, 오른쪽을 선택한 끝에 어느 숲길 가장자리에 차를 처박고서 멈춰 서게 된다. 몹시 추운 날씨다. 오가는 이 없는 낯선 벽지에서 그는 차에서 내려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가길 선택한다. 그로부터 이전까진 경험해본 적 없는, 그러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은 이라면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사건들을 겪어낸다.
▲ 샤이닝 책 표지
ⓒ 문학동네
낯선 표현, 이색적 서사... 낯선 거장의 스타일

포세 특유의 짧은 단문, 또 제멋대로에 가까운 문장부호의 활용이 작중 화자가 뻗쳐나가는 망상에 가까운 온갖 생각과 경험들로 이어진다. 제가 헤매는 숲 속에서 만날 수 없을 이들, 아마도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을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조우하고, 또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것들과 마주한다.

이는 포세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세상의 것인지, 그 너머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를 의심케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죽음에 이른 이가 겪고는 한다는 섬망증상을 소설화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 듯한 해석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 순간 <샤이닝> 속 화자가 이미 이승을 떠났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겪는 사건과 지각하는 방식이 이 세상의 것이라고 여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 세상과 하직을 고했는지를 두고는 다양한 해석이 엇갈린다. 다수는 작품 속 화자가 추운 숲을 헤매며 어느 차가운 돌 위에 올라간 어느 시점이라고 말하고, 또 누구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바로 그 순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명확한 확증 없이도 다른 해석을 내어놓게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이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부터가 이미 세상을 떠나 저승으로 향하는 시점을 다룬 것이 아니냔 것이다. 첫 문장부터가 '벗어났다'는 운전과 그리 밀접하게 맞닿지 않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면서도 차를 모는 화자의 모습과 지루함이며 산뜻함이 엇갈리는 이후의 이야기가 그렇다. 어쩌면 세상을 떠나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운전과 숲 속의 방황, 삶 가운데 정든 누구와의 조우 등으로 풀어내려 한 것은 아닐까.

겨우 80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이다. 인상은 있되 의도는 알 수 없는, 무엇을 안다고 해도 그 가치를 따져볼 수 없는 모호한 결말 뒤로 포세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이 따라붙는다. 나는 앞에 실린 작품 <샤이닝>보다도 뒤에 굳이 연설문을 붙인 문학동네의 감각에 감탄한다.

무엇이 노벨문학상 작가를 만들었는가

연설문에서 포세는 제가 문학으로 걸어들어갔던 지난 여정을 풀어낸다. 중학교 시절 급우들 사이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어내야 했던 순간의 공포, 두려움이 앗아간 언어를 되찾고자 쓰기에 매진했던 시간, 의사소통과 별개로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 문학의 언어들, 산문과 드라마, 시와 소설까지 제 문학의 영역을 넓혀갔던 선택을 떠올린다.

연설문 가운데 각별히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그건 그가 저의 첫 작품, 참담하게 실패한 데다 혹평까지 받은 <레드, 블랙>을 언급할 때다. 비평가들의 비난에도 포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평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오직 나 자신만을 믿고 나만의 것을 고수하리라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작품은 평단에 의해 발굴되고 주목받는다. 이때도 그는 생각한다. '내 작품을 향한 혹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순풍에도 몸을 맡기지 않고 오직 나만의 글을 쓰는 데 전념해야 한다는 초기의 결심을 고수'해야겠다고.

그는 노벨상 수상 뒤에도 이 결심을 변치 않고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와 같은 태도가 포세의 오늘을 만들었다 믿는다. 이 결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을 쓰는 평범한 작가가 되었거나, 아예 글을 쓰지 않는 이가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 충실한 작가, 세상의 판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이. 그런 태도가 누구와도 다른 저만의 작품을 쓰도록 한다. 욘 포세의 소설에 대한 호오판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누구와도 다른 작품을 써나가는 이라는 데 의견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낯선 책을 읽는 이로움에 대하여

그럼에도 나는 포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그러했듯 마침표를 쓰지 않거나 마침표가 들어가야 할 때 쉼표를 찍는다거나 중언부언 정신 나간 사람의 생각과 같은 어수선한 문장을 이어붙인다거나 아예 현실성 없는 유령들의 시간을 구성하는 일이 어떤 문학적 효과며 성취로 이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책 옮긴이의 말이나 여러 평자들의 비평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해보다는 느낌과 감각을 강조하는 태도에 당혹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고 감각할 수만 있는 문학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답이 있다면, 그 또한 이해가 아닌 감각만 가능할 것이라고 반쯤은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면 <샤이닝>은 오늘의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와 세대를 달리하는 열 명의 독자와 함께 이 책을 읽고 대화하며 나는 낯선 글을 읽는 일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익숙하고 흥미로우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글이 주는 미덕과 전혀 다른 가치가 이 책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왜 그는 마침표가 찍혀야 할 곳에 쉼표를 찍는가, 그것도 점점 더 죽음이 확실하며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쉼표가 남발되는가. 어째서 명확하지 않은 죽음 뒤의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재구성하는가.

그와 같은 생각들은 이 소설이 아니라면 좀체 닿을 수 없는 것이어서, 독자들은 그를 생각하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지적 자극을 얻는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의미이리라고 나는 애써 <샤이닝>의 가치를 길어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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