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인물보다 시대의 야만성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인에게 1970~80년대는 영화로, 다큐로, 드라마로 자주 접해 역사의 격동기로 각인돼 있다. 특히 1979년 10월 26일 벌어진 대통령 암살 사건과 그 이후 일어난 12·12 군사반란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과 ‘서울의 봄’(2023)으로 스크린에 재현됐다. 하지만 두 사건 사이, 대통령 암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주동자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정도만 조명됐을 뿐 나머지 인물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행복의 나라’는 많은 매체가 지나쳤던 10·26 사태 가담자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특히 10·26 사태에 대한 재판 당시 유일한 군인 신분이었던 실존 인물 박흥주 대령의 정치 재판에 초점을 맞췄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역시 역사적 사건을 자세히 서술하기보다 실제와 상상을 섞어가며 시대상으로 대변되는 세 인물(전상두, 정인후, 박태주)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행복의 나라’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역사 기록에 없는 15일의 틈새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며 12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추창민 감독의 신작이다. 동 시기의 사건을 다뤘던 ‘서울의 봄’과 이어지는 이야기인 만큼 ‘행복의 나라’는 개봉 전부터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거둔 큰 성공이 추 감독에겐 기대이기도, 부담이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추 감독은 “‘서울의 봄’은 대중적 장점이 큰 영화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봄’은 12·12와 관련된 인물과 사건을 다큐처럼 다루며 통쾌하게 전달했지만, 저희 영화는 그와는 결이 달랐다”며 “그래서 (영화의 성공에 대한) 기대감보단 이런 결의 영화를 관객이 좋아해줄까 하는 고민이 더 컸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처럼 ‘행복의 나라’는 심박수 챌린지를 끌어낼 만큼 큰 분노를 유발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따른 강직한 군인 박태주(이선균)란 인물과 청렴했던 그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밀실에서 재판을 도청하며 좌지우지하는 인물 전상두(유재명)를 최악의 악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추 감독은 “특정 인물보다는 그 시대를 말하고자 했다. 그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말이다. 그 시대의 권력층, 야만성은 가장 유명한 전두환으로 치환해 전상두란 캐릭터로 보여줬다”며 “그에 맞서는 인권변호사 정인후(조정석)는 그 시대가 가진 시민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박태주는 그런 시대에서 권력에 희생된 인물들을 상징한다. 세 사람의 개인적 서사보다는 좀 더 상징성을 가지고 그 시대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메인이 되는 재판 장면은 어느 한쪽을 편들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추 감독은 “관객들에게 이 작품이 진정성 있게 다가가려면 재판 장면이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악당을 설정했을 때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 한쪽은 옹호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법정 장면은 힘을 균등하게 줬다”며 “실제 재판은 재판관들이 반말하고 욕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면 재판이 허무맹랑해질 것 같았다. 양쪽이 공정하게 보여야 설득력이 생긴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재규란 인물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듯 제 개인적 판단을 넣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재판 장면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95% 가까이 실제와 일치시켰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영화는 재판 장면과 박태주의 삶을 제외하곤 실제와 상상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게 정인후가 골프장을 찾아간 장면과 육군참모총장이 박태주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기 위해 나서기로 한 장면이다. 추 감독은 “다큐가 아니라면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각색은 좋다 나쁘다보다는 설득의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인후가 박태주를 살리기 위해 골프를 치는 전상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장면은 가장 허구적인 장면임과 동시에 관객들 사이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장면이다. 통쾌하다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평과 지나치게 현실성이 떨어져 몰입을 깨트린다는 평으로 나뉜다.
이에 대해 추 감독은 “가장 시대적 상징성이 극대화된 게 골프장 장면이다. 골프공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대중을 상징한다. 그런데 전상두가 ‘3번 아이언이 잘 안된단 말이야’라고 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쉽사리 안 되는 게 대중이란 의미가 함축된 장면”이라며 “누군가는 ‘이게 말이 되냐’며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철옹성 같은 곳을 누군가 찾아간다면 독재자가 본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정인후가 전상두에게 일갈하는 장면을 통해 당시 항거했던 누군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런 은유와 표현들은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박태주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시민 정신을 깨달아나가는 정인후는 모티브가 된 태윤기 변호사란 실제 인물이 있지만 사실 10·26 주동자들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인단 모두를 대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정인후가 내뱉는 법정에서의 대사는 다른 변호사가 했던 말들도 섞여 있다.
상당수의 대사는 실제 재판에서 발언된 것들이지만 박태주가 정인후를 향해 ‘좋은 변호사’라고 말한 건 사실과 다르다. 추 감독은 “마지막 대사는 만들어진 대사”라며 “태인기 변호사를 비롯해 그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인권변호사들이 32명 정도 모였던 것으로 안다. 그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판단을 모두 유보한 추 감독이지만, 박태주의 모티브가 된 박흥주 대령에 대한 평가만큼은 명확히 했다. 뛰어난 머리를 가져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까지 올랐지만, 허름한 판잣집에 살며 전 재산이 400만원에 불과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은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료조사를 했을 때 상대편 검사도 박흥주 대령이 청렴하게 살았다는 건 인정했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실존 인물을 영화에 그려내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며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그가 그려온 삶의 궤적은 박수받을 일 아닌가 싶다. 마지막 30분의 판단 때문에 그의 인생 전체를 오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큰 사건보다는 그사이에 숨겨진 이야기,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추 감독의 마음은 정인후가 박태주를 향해 내뱉은 아이러니한 이 한마디에 응축돼 남았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김 부장만 기억해. 박태주는 기억 못 해.”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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