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산으로 간 ‘김영란법’
꺼리는데… 식사·선물 기준
맘대로 바꾸는 법 괜찮은가
늦깎이 부모가 된 뒤 새롭게 알게 된 많은 것 중 하나가 ‘어린이집 참여 수업’의 존재다.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 수업 희망자를 받는다는 공지를 보고 얼떨결에 나서게 됐다. 30분 동안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고심 끝에 4세반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변’을 주제로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변 얘기를 동화로 풀어낸 책을 한 권 사고 찰흙을 뭉텅이로 구매했다. 동물마다 다른 변 모양이 담긴 그림책을 보여주고 읽어준 뒤 흙으로 만들어 보자는 일종의 체험 수업을 계획했다.
30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들과 놀다 보니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보람찬 경험이었지만 이것이 ‘일’인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과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 입장에서 고마운 마음에 선생님들에게 별다방 커피 쿠폰이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정중히 거절할 거라는 아이 엄마 말에 뜻을 접었다. 국공립어린이집 선생님들이다 보니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때문에 선물은 거절한다고 한다. 법적 선물가액 한도는 5만원까지지만 구설에 오르느니 안 받는 길을 택한 것 같다.
국공립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초·중·고교, 그리고 대학도 매한가지다.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라고 교수님에게 커피 한 잔 선물하는 것조차 받는 일을 꺼린다는 얘기가 들린다. 김영란법을 지키겠다는 뜻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상황이 일상이 됐다.
일부 학교에서 부모가 촌지라 불리는 돈봉투를 담임선생님에게 주는 일이 문제이던 시대가 있었다. 이는 담당 반 학생들을 차별하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근절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라떼’(나 때는)라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20년 안팎의 과거 일이다. 현재의 선생님들 인식이 그때와 같으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인위적인 제재가 없더라도 그때처럼 선생님이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안타깝지만 지금 아이들의 미래, 그 초입 격인 대학 입시까지의 교육은 사교육이 점령했다. 그런데 학원 강사는 돈봉투를 받아도 불법이 아니다. 공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전혀 다른 이 잣대는 또 다시 김영란법을 어이없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또 한 가지 의아한 지점은 농축수산물 선물이다. 김영란법을 제정할 때만 해도 농축수산물 선물 역시 5만원 이하만 가능했다. 그랬던 선물 가액이 지금은 15만원이다. 명절 때면 30만원까지도 가능하다. 명분은 농어민 소득이다. 그런데 김영란법이 원래 농어민 소득을 고려해 만든 법인가. 선물을 받는 사람을 정조준했던 법은 갑자기 농어민 소득과 연동되는 법이 됐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농어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자신들이 만든 법을 무력화하는 촌극의 주인공이 됐다.
최근에는 밥값까지 머릿속에 혼란을 더 주기 시작했다. 식사 가액 기준이 인당 3만원 이하에서 5만원 이하로 변경됐다. 물가를 고려한 조치라고 한다. 이 역시 김영란법이 잣대를 마음껏 바꾸고 해석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법이라는 해석에 힘을 싣는 조치로 읽힌다. 이 법이 발효된 2016년 9월만 해도 국정감사 때 도시락을 사먹던 국회의원들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뭐가 됐든 국민들은 이 법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영부인의 ‘디올백’ 사건은 법리적 판단을 떠나 어이가 없지 않겠나 싶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인 공무원들조차 “한숨이 나온다”는 얘기를 한다. 김영란법 주무 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가 내놓은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행정 해석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이나 공무원이나 매한가지다. 3만원짜리 별다방 카드 선물도 안 받으려는 판국에 수백만원짜리 공산품은 괜찮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수시로 혼동을 주는 법의 대명사가 김영란법이 됐다. 이 법을 만든 입법부에 과연 김영란법은 무엇이었나를 묻고 싶다. 답을 줄지는 모르지만.
신준섭 경제부 차장 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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