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국제고 고시엔 우승, 그 뒤엔 이런 역사가 있다
[김현희 기자]
▲ 고시엔 우승 후 교가를 부르는 교토국제고 선수단. 한국어 교가가 일본 전역으로 방영되는 전무후무한 일이기도 했다. |
ⓒ NHK |
교토국제고는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는 한국어 교가로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받은 학교였다. 학교 정규 과정에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개설돼 있는데다 학교장과 주요 교직원들도 한국인 혹은 재일동포로 구성돼 있어 국내 야구팬들을 비롯한 국민 역시 애틋한 '동포애'를 느꼈을 법했다.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1999년에야 창단됐을 만큼 역사는 매우 짧지만, 그 기간 내에 고시엔 8강, 4강 진출 등 꾸준히 성적을 기록해 왔다. 이 학교 졸업생인 정규식과 황목치승(이상 LG 트윈스) 등이 KBO리그 진출까지 이뤄내기도 했다. 비록 현재 야구부에는 한국인이 없지만, 한국과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일본 현지 학생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교토국제고 야구부의 고시엔 우승은 비유하자면 서울 국제학교나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학교가 야구부를 구성해 청룡기 선수권에서 우승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야구 외에 큰 이슈거리가 될 수 있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교토에서 고시엔 우승팀이 나온 것은 무려 68년 만의 일로, 100년 넘는 고시엔 역사 가운데 교토 지역에서 우승팀이 나온 것은 교토국제고를 포함해 겨우 다섯 번 밖에 되지 않는다. 우승팀이 결정되자마자 호외까지 나온 것은 그만큼 지역사회 주민들의 기쁨으로도 연걸됐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교토국제고는 한국/국제 계열 학교의 첫 고시엔 우승이라는 역사를 남기게 됐다. 그런데, 한국계 학교의 고시엔 도전은 교토국제고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었던 황성 기독 청년회 야구단(이른바 황성 YMCA)이다. 황성 YMCA는 1916년 고시엔 진출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조선총독부의 출전 금지령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가 1921년 처음으로 고시엔 조선 예선대회가 열렸고, 이것이 바로 현재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의 효시가 된다.
▲ 1923년 고시엔 진출 당시의 휘문고보 선수단 |
ⓒ 대한체육회 |
휘문고보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순수 조선인으로 구성된 팀이 고시엔에 진출하지는 못했다. 일부 조선인 선수가 포함된 한국계 학교 중에는 대구상업(1930년), 평양중학(1932년), 선린상업(1933년), 신의주상업(1935년), 인천상업(1936년), 평양1중학(1940년)이 고시엔 경기를 뛰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및 광복 이후에는 청룡기 선수권을 시작으로 전국대회가 열리면서 고시엔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1940년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한국계 학교의 고시엔 진출은 교토국제고의 야구부 창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2021년에 처음으로 4강에 오르며 휘문고보가 지니고 있던 고시엔 8강 진출 기록을 무려 98년 만에 경신했다. 그리고 106회 고시엔 대회 우승으로 일본 고교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교토국제고가 대한민국 국적 재단 우승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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