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생명의 문자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만드는 시대

2024. 8. 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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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2010년 5월 20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화학적으로 합성된 유전체에 의해 조절되는 박테리아 세포의 창조’라는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생물학에서 ‘창조’란 흔히 ‘진화’와 대척점에서, 과학적 해석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을 뒷받침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어왔기에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세기에 생물학은 DNA라는 화학물질이 단세포인 박테리아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체의 정보를 저장하는 ‘생명의 문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 생명 만드는 합성생물학의 등장
DNA 편집으로 생명체 재창조
휴먼 지놈 프로젝트팀 연구 성과
유토피아·아수라장, 인류에 달려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기 ‘달리(DALL·E)’를 이용해 그린 합성생물학 이미지.

한글의 자모를 알면 한글로 쓰인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 담긴 뜻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써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정보를 담은 문자로서 DNA의 역할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생물의 유전체에 담긴 DNA 염기서열을 읽어내는 방법과 그 안에 든 의미(유전자)를 읽어내는 방법, 그리고 한글의 자모라 할 수 있는 뉴클레오티드(DNA의 기본 단위)를 붙여 DNA를 합성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글을 알고 이해하고 쓸 수 있다면,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생명의 문자인 DNA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이 합성생물학의 시작이었다.

생물다양성협약(CBD)에서는 합성생물학을 ‘유전물질과 생물체·생물시스템에 대한 이해·설계·재설계·제조를 쉽고, 가속화하기 위해 과학·기술·공학을 결합하는 현대 생명공학 기술의 추가적 개발이자 새로운 차원’ 으로 정의한다.

다소 포괄적이고 모호한 표현이기에 언뜻 이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보다 『포스트 게놈시대』의 저자 송기원 교수가 언급한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의 구성요소와 생물시스템을 설계하고 제작하거나, 혹은 기존에 존재하던 생물시스템을 재설계해 새로 제작하는 분야’라는 정의가 더 와 닿는다. 이에 따르면 합성생물학은 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학적 접근이며, 만들어내고자 하는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특징을 지닌다.

생명을 창조한 이들의 연구

미코플라스마 마이코이데스(Mycoplasma mycoides) 세균. 자연 번식하는 세균(왼쪽)과 DNA 인공 합성을 통해 생명 활동에 필요 없는 염색체를 제거해 DNA 숫자가 줄어든 세균(가운데)이다.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

서두에서 언급한 논문에 ‘창조’를 언급한 이들은 휴먼 지놈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크레이그 벤터 박사의 연구진들이었다. 이들은 유전체 크기가 작아 다루기 쉬운 미코플라즈마군에 속하는 세균 중의 한 종(mycoides, 이하 M)의 유전체를 분석해 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뒤, 이를 원래의 유전체를 제거한 다른 종류의 미코플라즈마(capricolum, 이하 C)에 이식했다.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생명 활동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합성된 M균의 유전체를 가진 C균은 이후 단백질 합성이나 성장 과정에서 M균의 특징을 보였다. 세상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합성 유전체를 지닌 새로운 세균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연구진들은 도발적으로 ‘창조’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 세균에게 ‘JCVI-sys 1.0’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생물체는 계속 만들어졌다. 2016년에는 1.0 버전에서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은 유전자를 제거해 세상에서 가장 적은 유전자를 가진 최소 유전체 생물인 ‘JCVI-syn 3.0’이 탄생했다. 2021년에는 생존에는 별 이상이 없지만 세포분열은 다소 불안정한 JCVI-syn 3.0에 7개의 유전자를 추가해 안정적 세포분열을 통한 번식도 활발한 ‘JCVI-syn 3A’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생명체가 가진 유전체를 분석해, 목적에 따라 유전자를 줄이거나 늘리고, 심지어 유전자 그 자체를 합성해 생물을 재설계할 수 있음이 알려지자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졌다. 단기적으로는 신종 바이러스나 암을 유전적으로 무력화하는 백신, 특정 물질을 합성하거나 정제하거나 분해하는 능력을 갖춘 미생물, 친환경 에너지원이나 정교한 바이오센서의 기능을 하는 미생물 등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고, 나아가서는 생물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말로 ‘인공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그대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어진다. 다학제적 특성을 지닌 합성생물학의 특성을 반영한 통합시설인 바이오파운드리에 대한 논의와 투자가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찾고 바꾸고 창조해내는 인류의 특성

인류가 처음으로 몸을 누인 공간은 천연동굴처럼 자연에 원래 존재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점차 돌과 나무처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엮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진흙을 구워 벽돌과 기와를 만들었고, 모래를 녹여 유리를 만들었다. 결국에는 자연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합금과 플라스틱 같은 인공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기술의 발전은 늘 비슷한 순서대로 흘러갔다. 자연물에 맞추어 살다가 자연물을 이용해 다양한 조합들을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까지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 자신이 속해 있는 자연의 카테고리, 즉 생명 그 자체에까지 그 익숙한 흐름을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 수렵과 채집의 대상일 뿐이었던 동식물을 끈질기게 길들여 작물과 가축으로 변모시켰고, 유전자 편집을 통해 원래는 없던 형질을 가진 생물들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제는 자신을 만든 생명의 문자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만드는 시기에 들어섰다. 앞으로 인류가 분석하고 셜계하고 만들어낼 대상의 목록에 생명체라는 유기시스템이 추가된 셈이다. 그 가능성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다양한 유기체가 공존하는 생물학적 유토피아로 이끌지, 아니면 생물을 고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적 대상으로만 보고 세상을 이익 극대화를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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