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농사 짓다가 분노한 농민, 그 섬에서 일어난 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최대 목적은 한국 황제를 퇴위시키거나 한국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항일세력을 탄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민중을 빼앗고 한국 땅을 빼앗아 일본 왕실과 대자본가들의 곳간을 늘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영토보다 노동력 확보가 더 우선시됐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가 조선 사람들을 끌고 돌아가는 장면도 있었듯이, 인구밀도가 낮았던 시절에는 상대국의 노동력을 빼앗는 것이 전쟁의 최대 동기였다. 대지주인 군주와 대귀족들의 경제지표가 전쟁 발발 여부를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였다.
일제가 민중과 땅을 빼앗고자 침략했으므로, 일제로부터 민중과 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요체였다. 그런 점에서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반일투쟁의 꽃이었다.
그런데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뒷전으로 처져 있다. 지식인이나 전직 관료, 군인들의 항일투쟁이 주로 기억되고 칭송될 뿐이다. 전남 신안군 도초면 도초도의 농민들과 이들의 지도자인 김용택(金容澤)이 전개한 반일투쟁은 별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중에 김용택이란 이름을 가진 분은 둘이다.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게 피살된 김용택(金龍澤)이 있고, 만주지역의 또 다른 단체인 정의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1929년에 일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김용택(金用澤)이 있다.
참의부 김용택에게는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정의부 김용택에게는 1995년에 같은 훈장이 추서됐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용택은 이런 영예와는 무관하다.
▲ 전남 신안군 도초도 시목해변. |
ⓒ 권우성 |
1924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낳은 하의도의 바로 위쪽인 이 섬에서, 바로 그해부터 역사적인 소작쟁의가 발생한 것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다. 1987년 6월항쟁 직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듯이, 3·1운동 뒤에는 그 열기를 바탕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단결투쟁이 활발해졌다. 이런 움직임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전남 지역이다. 농지도 많고 소작농도 많았기 때문이다.
도초도 소작쟁의는 이 섬의 동북쪽인 암태도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발생한 뒤에 일어났다. 김용택 외 14인에 대한 1926년 5월 10일 자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은 "전라남도 무안군 도초면에서 소작인들은 대정 13년 10월 중에 소작 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피고인 김용택 등의 주창에 의해 도초면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라는 말로 기술한다.
노동쟁의에선 '올려달라'가 핵심 요구사항이지만, 소작쟁의에선 '내려달라'가 핵심 요구였다. 위 판결문은 논농사 소작료를 5할에서 4할로 내려달라는 것이 김용택 등의 요구였다고 알려준다.
말로는 수확량의 5할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일 때가 비일비재했다. 지주의 대리인인 마름이 소작인과 협의해 수확량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수확량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협상과 달리 소작농과 지주의 협상에서는 "금년에 많이 수확했잖아"라며 갑이 을의 성과를 실제보다 부풀리고 을을 띄워주는 양상이 있었다.
2010년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54집에 실린 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논문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에 따르면,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은 '을 띄워주기'에 능숙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나 재판 기록에 의하면, 문재철은 논에서 6할 혹은 그 이상(7~8할)의 소작료를 거두어가고 있었다고 한다"라고 논문은 설명한다.
김용택 등은 농경의 주역인 자신들이 불합리한 이유로 고율의 소작료를 뜯기는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작농에 대한 전통적 착취가 일제의 지배로 더욱 가중되는 현상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인 지주인 나카미치 세이타로 등을 만나러 배에 올라탔다. 위 판결문은 "피고인 김용택·김상희 등이 소작인회를 대표하여 목포로 달려가 중도청태랑(中道淸太郞) 외 여러 명의 지주를 방문"했다고 기술한다.
일본인 지주들은 방문객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김용택 등은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소작료를 한 푼도 내지 않겠다며 소작료 불납운동을 벌였다. 판결문은 이들이 그해 10월에 내야 할 보리농사 소작료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투쟁이 상당히 속도감 있게 전개됐던 것이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일본제국주의 공권력이 끼어들었다. 법원과 경찰과 행정관청이 지주 쪽을 편들며 소작인들을 탄압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이 때문에 소작농 대 '지주-일제 연합'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원호처(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84년에 펴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4권은 주요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 1925.10.7. 전남 무안군 도초도에서는 불납한 소작료에 대한 가차압을 시행하려고 온 집달리와 경관에 대항하여 소작인 1000여 명이 시위 행렬하다.
○ 1925.10.11. 전남 무안군 도초도에 목포경찰서의 무장경관 120명이 출동하여 새벽에 동도 소작회 간부 20여 명을 검거하다.
○ 1925.10.19. 무안군 도초도의 소작쟁의사건으로 소작회 간부 등이 구금된 것에 분개하여 동(同) 소작회원들은 목포서에 쇄도하여 경찰과 대충돌하여 중경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10여 명이 검속되다.
▲ 김용택 외 14인의 소작쟁의에 대한 1926년 5월 10일자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 중 일부 |
ⓒ 국가기록원 |
이 와중에 '탄핵소추'의 불똥을 맞은 이도 있다. 2020년에 <한국사학보> 제86호에 실린 최성환 목포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도초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에 따르면, 김용택 등은 소작인회가 결성된 1924년 10월에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면장 고석규 불신임안 제출을 결의했다. 그런 뒤 12월 27일, 고석규를 탄핵하는 진정서를 무안군청에 제출했다.
이 일은 유력 일간지에도 보도됐다. 그해 12월 28일자 <조선일보>는 '도초면장 배척'이라는 기사에서 고석규가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미움을 많이 받는지를 소개했다. 신문 2면 중간에 있는 이 기사 옆에는 고석규의 비행을 한층 상세히 소개하는 별도의 기사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고석규는 행정업무는 게을리하면서도 일본인 지주들을 비호하고 소작료 징수를 돕는 일에는 열심을 보였다. 자기 동생 고순규에게 일본인들의 소작료를 받아주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다. 안 그래도 법원 집행관들이 하고 있는 일을 고순규가 거들도록 한 것이다. 고순규는 소작료를 거둬가는 수준이 아니라 소작농 집에 침입해 곡식을 그냥 집어 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이렇게 한국 민중 대 지주-일제 연합의 구도로 전개된 도초도 소작쟁의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위 논문은 "40여 명의 지주로부터 4할제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동시에, 소작인회 지도자들은 탄압과 수감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위 논문에 따르면, 김용택은 징역 10월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약 16개월간 수감됐다. 김상희는 징역 8월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약 12개월을 살았다. 그 외의 약 20명은 5개월에서 11개월 정도를 살았다.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사람들이 소작인회를 이끌었을 것이므로, 이들이 농토를 떠나 감옥에 수감된 기간 동안에 지역 농민들의 생계유지와 농업경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김용택이 주도한 도초도 소작쟁의는 전통적인 지주들을 뺨치는 일본제국주의의 농민 착취로부터 한국 농민과 한국 농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의 투쟁에 열광하고 찬사를 보냈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햇수로 2년에 걸쳐 수감생활을 했고, 형무소도 광주와 대구를 오갔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김용택은 해방 이후 무안군의 초대 군수(재직 기간 1948.12.11~1950.4.1)를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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