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 숨어 사는 가족... 이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조영준 2024. 8. 2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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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81] EIDF 2024 상영작 <땅 아래 사람들>

제 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32개국 53편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작품 중 눈에 띄는 다큐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조영준 기자]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땅 아래 사람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군사 작전 개시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역에 실시된 폭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를 둘러싼 원인과 목적에 대해 수많은 의견을 쏟아내고 이후 전망에 대해서도 예견했지만,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위협을 받는 것은 역시 국민들의 일상이다. 참화 속에서 수많은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 기반 시설과 생활 터전이 무너지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삶은 이전의 시간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이반 오스트로호프스키·파볼 페카르치크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땅 아래 사람들>에는 지상의 폭격을 피해 지하 공간으로 찾아들어간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중에도 지속돼야 할 일상과 생존을 위해 그들은 본 기능을 상실한 지하철과 역사를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택했다.

줄을 지어 늘어진 작은 텐트와 멈춘 지하철 객실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모습은 'Entrance to the metro', 지하철 입구라고 쓰인 표지판이 무색할 정도. 두 감독은 나름의 피난처를 찾아 모여든 주민들의 생활과 그들이 공유하는 감정을 통해 전쟁의 이면에 놓인 현실을 그려내고자 한다.

이 촬영은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인 2022년 4월 시작돼 2023년 1월까지 8개월간, 최전선으로부터 약 2.5km 떨어진 하르키우 헤로이우 프라치역에서 이루어졌다.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땅 아래 사람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2.
작품의 시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언젠가 맞은 폭격으로 인해 철근이 모두 녹아내린 오래된 가게 하나와 가까운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폭격음이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로 위의 사람들은 일제히 모습을 감춘다. 지하로 숨어 들어가거나 인근의 건물 안으로 몸을 피하는 식이다. 끝나지 않는 러시아의 폭격은 이곳 주민들의 지상의 일상을 모두 빼앗고 삶의 모습마저 모두 바꿔버렸다. 지하의 역사로 내려가 일상을 구하고자 했던 이유다.

모든 주민이 역사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택에 방공호가 마련돼 있는 가족은 여전히 자신들의 집에 머물고 있기도 하다. 땅 아래의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다큐멘터리의 중심에 놓인 열두 살 니키타와 가족의 생활 역시 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생활한 지도 벌써 한 달.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부족한데다 생활 패턴이 망가지며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배급도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수프나 빵을 구하기도 힘들어지고 있고, 양동이에 물을 받아 머리만 겨우 감는 날들이 이어진다. 지상의 소식이 먼 타지의 일처럼 전해지는 일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의 집이 포격을 맞아 무너졌다던가, 길을 걷고 있던 이가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들.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만 들리던 공습경보와 대피 사이렌도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주 반복된다.

03.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어른들에게는 견딜 만하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어서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오래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아이들은 벌써 나가고 싶어 하고, 지상으로 나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소식보다는 무사히 돌아온 이들의 무용담을 부러워하기 바쁘다. 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하는 걸까.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전장이 어떻게 형성되고 언제 누가 폭격을 맞아 세상을 떠나고 하는 식의 땅 위의 소식을 전해주는 스마트폰만이 아이들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이 작품에서 아이들이 어른만큼이나 중요한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에서의 차이만 제외하면 동등한 수준의 인격체로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른들의 사정이지만 그 과정의 고통과 참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은 피난처에서 아이들이 세상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어른들의 기억과 스마트폰 속의 작은 화면뿐이라는 것이 그 반증이 된다. 차갑고 단단한 쇠붙이, 지하철이 다니던 길 위의 철로와 운행을 멈춘 차량이 유일하게 허락된 놀이터다.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땅 아래 사람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4.
영상 곳곳에 배치된 장면들. 아직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 도시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필름 몇 개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내일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사랑을 노래하는 노인의 기타 연주와 음악 소리.

그리고 이제 막 지하철 승합실의 커뮤니티에 처음 발을 들인 여성을 위로하는 모두의 따뜻한 목소리가 작품이 끝난 뒤에도 작은 메아리처럼 마음속에 퍼진다.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땅 아래에서 오늘을 구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 뒤에 아직 짓밟히지 않은 민족의 유대감과 자긍심,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지상의 건물들 곳곳에는 아직 땅 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이 쓴 문구가 짙고 굵게 남아있다. 국경 너머에서 날아올 미사일과 포탄이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한 문장의 이 짧은 문구는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외침이나 다름없다.

'이곳에도 아이들과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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