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와인이 이럴 줄 몰랐지

임승수 2024. 8. 2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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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장어구이와 피노 누아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임승수 기자]

평소 날 보고 반백 살 먹은 큰아들 같다며 투덜대는 아내. 그래도 우리 남편 참 괜찮다고 칭찬하는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무지성無知性' 여행 성향이다. 뇌가 발달하지 않은 일차원적 유기체처럼 아내가 짠 여행 일정에 토 달지 않고 졸졸 따라다닌다. 방문할 곳을 지도에 일일이 표시하고 하나씩 도장 깨기 하는 아내로서는 이런 나를 최고의 여행 파트너(짐꾼)로 여긴다.

이번 8박 9일 홋카이도 가족 여행도 전적으로 아내가 이끌었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 그 '유지성有知性'의 순간은 지난 7월 25일 저녁이었다. 무려 내가 앞장서서 가족을 이끌고 향한 목적지는 삿포로 스스키노역 인근의 와인바 '반나츄'. 홋카이도 와인이 그렇게 맛있다는 풍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홋카이도 와인에 홀리다

번역 앱과 손짓발짓을 총동원해 주문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차례차례 제공되는 음식과 와인을 학력고사 문제처럼 세상 진지하고 경건하게 영접했다. 이날 홋카이도 와인 세 가지를 각각 잔술로 마셨는데 모두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도멘 타카히코 소가의 나나츠모리 와인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혀를 부드러운 양모로 감싸는 듯한 감칠맛과 일본 다도茶道 예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섬세함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내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 와인의 후폭풍으로 예정에 없던 와인숍까지 방문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장님에게 도멘 타카히코 소가는 없냐고 문의하니 '솔드아웃'이라고 무덤덤하게 답하신다. 워낙 인기 있어 구하기 어렵다더니 사실이구나. 솔직히 말해 가격이 상당한 와인이라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돈을 아낀 셈인지도 모르겠다.

감칠맛이 좋은 다른 홋카이도 와인을 추천해 줄 수 없냐고 물어보니 잠깐만 기다리란다. 어디선가 와인 한 병을 들고 와서는 도멘 타카히코 소가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추천하는데, 그 녀석의 이름은 미소노 빈야드 피노 누아다.

가격은 6,600엔. 홋카이도 와인의 매력에 홀린 상태라 망설임 없이 결제하고 백팩에 챙겨 넣었다. 마침 아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하고 즉시 와인숍을 나와 무지성 모드로 전환했다.
▲ 미소노 빈야드 피노 누아 코르크 마개 위에 밀랍을 덮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 와인이 그러하다.
ⓒ 임승수
길다면 긴 여행을 마치고 7월 31일에 한국으로 돌아왔건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홋카이도 와인의 맛과 향이 맴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구입한 홋카이도 와인을 개봉할 적절한 순간이 도래했다.

곁들일 음식을 고민하다가 불현듯 기름진 장어구이가 떠올랐다. 그래. 감칠맛 풍부한 홋카이도 와인에는 역시 감칠맛 음식이 제격 아니겠어? 즉시 배달 앱으로 주문을 넣었다.

셀러에서 와인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 위에 밀랍을 덮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 와인이 그러하다. 예전에는 어떻게 개봉하는지 몰라 허둥댔지만, 지금은 망설임 없이 스크루를 밀랍 안으로 쑤셔 넣고 그대로 코르크를 뽑아낸다. 밀랍은 자연스럽게 부서진다.

먹음직스러운 장어구이가 도착했다. 고추장 양념은 자칫 피노 누아의 섬세한 풍미를 덮을 우려가 있어 소금구이와 간장구이를 주문했다. 일단 배가 고파 일단 소금구이 장어부터 하나 집어서 씹기 시작했다. 한없이 부드럽고 기름진 육질이 포근한 온기를 품고서는 저작운동을 수행하는 치아 사이에서 몽글몽글 바서진다. 장어만 먹고 살 수 있다면 치아의 딱딱한 에나멜질은 필요가 없겠구나.

이제 잔에 따라놓은 와인을 바라본다. 일반 피노 누아에서 관찰되는 루비 레드가 아니다. 다소 탁한 갈색빛에 누가 보면 물 탔다고 할 정도로 투명하다. 양조할 때 필터링을 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내추럴 스타일을 지향하는 듯하다. 향을 맡으니 은은하게 퍼지는 흙, 삼나무, 체리 향이 제법 운치가 있다.
▲ 장어구이와 피노 누아 고추장 양념은 자칫 피노 누아의 섬세한 풍미를 덮을 우려가 있어 소금구이와 간장구이를 주문했다.
ⓒ 임승수
음식과의 근사한 궁합을 기대하며 한 모금 마시는데, 호오! 요만큼도 거슬림이 없는 도가적 무위자연의 맛이 새벽 산허리에 둘린 짙은 안개처럼 은밀하고 조용하게 퍼져간다. 혀를 감싸는 압도적 감칠맛. 느긋하게 올라오는 기분 좋은 짭조름함. 그 사이를 슬며시 비집고 들어와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미묘한 신맛과 은근한 타닌. 끊임없이 변하는 맛들의 이 여유로운 시차가 참으로 절묘하다. 무릉도원의 선인들이 와인을 마신다면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문득 홋카이도 비에이의 '청의 호수'가 떠오른다. 청록색 수면 위에 주변의 산과 나무가 데칼코마니처럼 비치는데, 그 비현실적 이미지에 눈길을 사로잡히면 시간과 공간 감각이 시나브로 왜곡된다. 아참! 내가 장어구이를 먹고 있던 중이었지? 신선놀음에 도끼 썩는 줄 모른다더니, 와인 놀음에 장어 식어가는 줄도 모르겠네. 와인에 홀려 장어구이와의 궁합 따위는 망각한 것이다.

내추럴을 지향하는 신생 와이너리

이건 6,600엔의 기량이 아닌데? 가격의 몇 배에 달하는 만족감을 얻고 호기심이 들어 와이너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니 2021년에 홋카이도 요이치 지역의 15번째 와이너리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유기 비료를 사용하고, 화학농약을 쓰지 않고, 생태계를 존중해 땅도 갈지 않고 풀이 자라는 땅에서 그대로 포도를 재배한단다. 양조할 때는 천연 효모를 사용하며 첨가물이 없고 필터링을 하지 않는다고. 요이치 땅에서 자란 포도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데, 역시 예상대로 내추럴을 지향하는 신생 와이너리구나.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어설프게 흉내 내지 않는다. 홋카이도 와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담겠다는 철학이 느껴진다. 그 목표를 향한 진지한 노력이 맛과 향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안주 없이 단독으로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 얼마 만인가.

"이게 마지막 잔이야."
"색이 소고기 핏물 같네."
"필터링하지 않는 와인이고 막잔이라 부유물이 많아서 그래."
"오빠가 옛날에 소고기뭇국 끓여준다며 소고기 핏물 빼던 게 생각나네."

맞다. 그때 간장을 너무 부어서 먹기 힘들 정도로 짰는데, 그 탓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가? 흐흐. 그 짜디짠 국을 아무런 불평 없이 먹어줬던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눈앞의 장어구이 너한테도 미안하구나. 맛으로도 영양적으로도 온몸을 던져 우리 가족에게 봉사하고, 게다가 와인과의 궁합도 좋았는데 말이야.

아내와 건배한 후 소고기 핏물 같은 액체를 마저 비우고 그 소고기뭇국 시절을 되새기며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고 있는데 콧속 와인 향이 여전히 선명하다. 그 유명한 도멘 타카히코 소가도 처음에는 신생 와이너리였지 아니한가. 머지않아 미소노 빈야드 피노 누아를 찾는 사람이 상당히 늘어나 가격이 상승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속 편하게 와인 취미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너그러운 '무지성' 음주 덕분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무지성'이로구나. 소중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내 지성은 스마트폰처럼 잠시 꺼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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