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3회 야구장 가지만, 야구는 안보고 온난화와 싸우는 여자
야구장에서 지구 온난화와 맞서는 이가 있다. 한 주에 평균 세 차례씩 서울 잠실야구장에 가지만, 제대로 경기를 본 적은 없다. 주인공은 서울시 자원순환과 김승미(28) 주무관. 김 주무관은 ‘1회용품 없는 잠실야구장’ 프로그램을 담당한다. 한 마디로 식음매장에서 흔히 쓰이는 일회용기 대신 다회용기를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보급하는 게 그의 일이다.
시작은 이랬다. 올해 초 세계 최대 석유ㆍ화학기업인 아람코 측에서 사회적 책임(CSR)활동의 일부로 서울시에 기부금을 내겠다고 제안해왔다. 마침 서울시도 잠실야구장 등 대규모 다중이용시설에서 일회용기 사용을 줄일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다회용기 색깔 골라
김 주무관은 먼저 일회용기를 대신할 다회용기 제작에 착수했다. 용기는 최대한 예쁘고 견고하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김 주무관은 25일 “음식이 담기는 만큼 더 맛있어 보일 수 있도록 분홍색을 기본으로 했다”고 소개했다. 음식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뚜껑은 무조건 투명하게 만들었다. 용기에는 전파식별(RFID) 태그가 내장돼 있어 사용 이력을 추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릇 제작 업체에서는 ‘김 주무관이 너무 꼼꼼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다회용기 색깔을 고르는데 의견을 냈다. 제작에 착수한 지 한 달여 만에 용기 3종ㆍ컵 3종 등 총 6종, 10만개의 다회용기가 준비됐다. 김 주무관은 “시즌 개막에 맞춰야 하는 만큼 보통 두 달 정도 걸리는 용기 개발ㆍ제작을 한 달 만에 끝냈다”고 했다.
공들여 만든 덕에 야구장 입점 매장들도 큰 거부감 없이 서울시의 다회용기를 채택했다. 다회용기는 무료로 보급했다. 현재는 야구장 내 63개 식음매장 중 38곳에서 이 다회용기를 사용한다. 다만 수거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1층 외부 매장은 제외했다.
9회 경기 끝나고 가장 바빠
용기 반납은 야구장 곳곳에 위치한 22곳의 반납함에서 이뤄진다. 마냥 수거함을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방법상 비워둬야 하는 공간도 있고, 관객들의 이동 동선도 고려해야 한다. 반납 상황 등을 챙기다 보니 경기가 있을 때면 그는 거의 매번 현장에서 대기한다. 자주 야구장에 오다 보니 노하우도 생겼다. 그는 “5회쯤 진행됐을 때 야구장에 도착하고, 7회부터는 수거함을 둘러본다. 경기가 끝난 다음 사람들이 몰릴 때가 가장 바쁜 시간”이라고 말했다.
야간 경기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야근도 늘었다. 주말 근무는 기본이 됐다. 그는 “원래 야구장에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정도였는데, 올해는 매주 두세 번씩 온다”고 말하며 웃었다. 보통의 야구장 관계자들과 달리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했다. 경기가 순연되는 만큼 혹시 모를 사태가 생기지 않을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느 구단 팬이냐는 물음에는 “서울 연고 구단”이라고만 답하며 웃었다.
다회용기 세척 및 물류작업은 서울지역자활센터협회가 맡았다. 참고로 한 번 사용된 용기는 세척 등을 거쳐 다시 잠실야구장으로 돌아온다. ‘그릇의 귀환’에는 보통 4~5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야구장 다회용기 도입으로 넉 달 만에 폐기물 9.8t 줄여
성과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시에 따르면 지난 4월 초 프로그램 도입 후 현재까지 약 35만회 다회용기가 사용됐다. 폐기물 감량분은 9.8t에 이른다. 30% 선에 그쳤던 용기 반납률도 지난달 말에는 71%로 높아졌다. 남은 숙제는 반납률을 높이는 일이다. 하지만 일거에 사람이 몰리는 야구장 특성상 용기 보증금 등을 부과하는 건 아직 무리라고 했다. 또 용기가 예쁘다 보니, 이를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가는 이도 많다고 한다.
잠실야구장 사례가 알려지면서 타 지자체에서 노하우를 물어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최홍주 서울시 생활폐기물감량팀장은 “연고 프로 스포츠 구단이 있는 지자체에선 대부분 서울시에 관련 노하우를 물어왔다”고 소개했다. 보람도 크다. 김 주무관은 “야구장 현장에서 친구나 연인으로 보이는 분들이 서로에게 반납 방법을 알려주는 경우를 종종 볼 때가 가장 기쁘다”고 했다. 그에겐 버릇이 생겼다.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쓰레기통이나 분리수거함 등을 유심히 살펴본다. 배달음식도 잘 안 먹게 됐다고 했다. 친구·동료들 사이에서는 ‘미스 다회용기’란 별명이 붙었다.
서울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다른 경기장은 물론 1회용품 폐기물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장례식당이나, 지역축제 현장 등으로도 다회용기 사용 범위를 넓혀간다는 목표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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