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박흥주 재판,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행복의 나라②]
내란죄 성립 불가한 이유 조목조목 지적
법률상 의무충돌도 파악 "위법성 없어져"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정인후(조정석)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를 변호한다. 법정에서 10·26 사건에 의도치 않게 휘말렸다고 주장한다. 현실은 다른 피고인들보다 더 열악하다. 현역 군인인 관계로 단심제를 적용받는다. 1심 판결과 함께 형이 확정된다.
정인후는 위헌 여부 제청을 신청한다. 모티브가 된 변호사 태윤기도 그랬다. 박태주가 가리키는 박흥주를 변호하며 현역 군인으로서 군법회의법에 따라 단심으로 끝나 상소를 할 수 없는 점을 문제시했다. 헌법 위반인지 여부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해달라고 했다.
재판장은 비상계엄 아래서 군인에 대한 범죄에 관해 단심제를 규정한 군법회의법을 위헌이라 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위헌 여부 제청 신청만으로는 10·26 사건 재판 진행의 장애 사유가 되지 않으므로 재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태윤기는 생사에 관한 중대한 문제라고 역설했다. 이 법정에서 간단하게 이유가 없다며 내릴 결정이 아니라며 헌법위원회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재차 주장했다. 박흥주를 공정하게 재판해준다고 믿을 수 없다면서 재판관 전원에 대한 기피 신청을 하겠다고 밝혔다.
김재규를 변호한 안동일이 2017년 출간한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에 따르면 순간 법정 분위기는 과열됐다. 검찰관인 전창렬 중령이 작심한 듯 발언했다.
"변호인들께서 공익의 대표자로서 사회적 정의 실현이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법 절차를 악용해 김재규 피고인의 실패한 국가 변란의 기도를 비호함으로써 진실을 오도하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경우 이는 전적으로 변호인단의 책임이고 양식 있는 국민의 준엄한 비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는 바입니다."
일련의 상황은 대법정 재판부 출입문 바로 앞방에 있는 법무감 집무실에 중계되고 있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모여 모든 공방을 청취했다.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대책을 세우고, 그때그때 쪽지에 적어 재판부에 전달했다. 우리나라 재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태윤기는 변론에서 역설적 어조로 이 같은 상황을 꼬집었다. "역사적인 본건 재판에 있어 박흥주 피고인의 변론을 맡게 돼 눈으로 직접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M16 소통을 든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진행되는 재판에 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어진 재판에서 태윤기는 10·26 사건과 형법 87조의 내란죄와 88조의 내란목적살인죄가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두 죄에 모두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고 적시돼 있는데, 김재규 피고인이 국방부에서 계엄을 합법적으로 펴려 했으므로 국헌을 문란하게 하려는 행동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혁명위를 설치하려 한 것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북괴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자연인 박정희 씨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김재규가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나 나나 같이 죽는다', '참모총장 등이 와 있다'라고 했을 때, 박흥주는 '무언가 내가 잘 모르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건 당일 박흥주의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중정의 엄한 규율이 작용한 결과라고 역설했다.
"박흥주 피고인은 '명령과 이행은 조직의 필수 여건'이라고 했고, 김재규 피고인도 '박흥주 피고인 등에게 명령을 선택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도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복종과 명령은 조직원의 필수 요건입니다. 특히 중정에서 부하는 명령을 비판할 자유가 없습니다."
태윤기가 내세운 항변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법률상 의무충돌이다. 박흥주는 상관의 명령과 도덕적 의무 가운데 군인으로서 전자를 택했다. 군대라는 조직을 고려하면 위법성을 찾을 수 없다.
태윤기는 박흥주가 미래 육군참모총장이라고 칭송받았을 정도로 유능하고 청렴한 군인이었던 점도 강하게 어필했다. "피고인은 육사를 나온 군인으로서 중정부장 수행비서관이라는 막강한 권력 기관에 있으면서도 현재 행당동 꼭대기에 있는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다. 부인과 아이들을 생각해 정상을 참작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기도 전에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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