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능아" 혐오단어는 쓱 지운다…장애인 손글씨로 만든 서체

이영근 2024. 8. 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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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발달장애인 남태준(25)씨와 이종원(33)씨가 자신의 손글씨를 본 뜬 글꼴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각각 "발달장애인을 안 좋게 쳐다보지 말고, 기분 좋게 쳐다봐주라!", "발달장애인 차별하지 마세요! 발달장애인도 자립할 수 있다!"라고 적었다. 이영근 기자


어떤 글꼴은 그 사람을 닮는다. 발달장애인 이종원(33)씨는 만나자마자 또박또박 인사말을 건넸다. 메모가 습관인 그의 수첩엔 오와 열을 맞춰 반듯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발달장애인이자 활동가인 남태준(25)씨는 거리와 연단에서 목소리 높이는 일이 잦다. 그가 즉석에서 적은 글씨는 테두리만 있고 여백이 넉넉해 호방했다.

두 사람의 정체성을 담은 글꼴에는 각각 ‘피플퍼스트 또박체(종원)’와 ‘피플퍼스트 투쟁체(태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성북’이 서체 디자이너 배성우씨, 공연예술 기획자 고주영씨와 협업해 지난 6월 27일 공식 출시한 글꼴들이다.

(위) 발달장애인 활동가 남태준(25)씨의 손글씨를 본 뜬 '피플퍼스트 투쟁체'와 발달장애인 풋살선수 이종원(33)씨의 손글씨를 본 뜬 '피플퍼스트 또박체'. 사진 피플퍼스트성북 유튜브 캡처


개발을 맡은 배 디자이너는 “2022년 1월쯤 피플퍼스트성북센터와 고 기획자를 통해 제안을 받았다. 발달장애인을 알리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 흔쾌히 수락했다”고 말했다. 배 디자이너는 지난 2020년 성 소수자 자긍심을 상징하는 ‘길벗체’ 제작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다.

센터 구성원 중 누구의 글씨체를 글꼴로 만들지 정해야 했다. 김하은 피플퍼스트성북 활동가의 눈에 종원과 태준이 들어왔다. 김 활동가는 “평소 종원과 태준의 글씨체가 이쁘기로 유명했다”며 “종원은 당시 자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징성이 있다고 봤고, 태준은 투쟁을 나갈 때마다 피켓 글씨 작성을 도맡곤 했다”고 했다. 평소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글씨체를 내놓았다.

서체 디자이너 배성우(35)씨가 지난 2020년 1월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인 '길벗체'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길벗체는 비온뒤무지개재단과 길벗체 개발팀 7명, 후원자 474명이 함께 만들었다. 배성우씨 제공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글꼴 제작에 필요한 글자 수는 총 3069자(한글·알파벳·숫자·특수부호). 특히 모아쓰기가 있는 한글은 제작이 더 까다롭다. 두 사람은 2780자의 한글 손글씨를 써야 했다. 태준은 “식곤증이 밀려와 글씨를 쓰다 존 적도 많다”며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2년 7개월 만에 두 글꼴이 공식 출시됐다. 강정원 피플퍼스트성북 활동가는 “또박체는 획 끝이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워 본문에 사용하면 좋다. 투쟁체는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어우러져 힘차고 활기찬 느낌을 줘 피켓이나 제목에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특별한 기능도 넣었다. 또박체는 장애 혐오 단어를 타이핑하면 자동으로 지워진다. ‘병신, 정신 지체, 바보, 저능아, 자폐증’ 등 10개 단어에 적용된다.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되는 혐오 단어를 여러 논의 끝에 정했다고 한다. 최근 의학계에선 다양한 증상과 강도가 공존한다는 뜻에서 자폐증 대신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다.

피플퍼스트 또박체에는 장애 혐오 단어를 적으면 자동으로 지워지는 기능이 있다. 어도비 프로그램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사진 피플퍼스트성북 유튜브 캡처


호응도 잇따르고 있다. 장애 단체뿐 아니라 산업재해 피해자 단체,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등에서 글꼴을 사용하고 있다. 한 출판사는 두 글꼴을 사용한 어린이 철학책을 펴낼 예정이라고 한다. 배 디자이너는 “확장성과 전파성은 소통 매개로서 서체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자립한 종원은 대우건설 소속 풋살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식사 준비, 빨래, 청소 등 일상생활을 혼자 할 수 있다고 한다. 종원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태준도 자립을 준비 중이다. “이웃으로 살아가는 발달장애인이 많은데 잘 몰라서 생기는 오해도 있는 것 같아요. 글꼴을 통해 사람들이 우리를 더 잘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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