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업계 화들짝…‘논란의 보고서’ 뭐길래
전 세계 기업의 주된 탄소중립 전략 중 하나는 ‘탄소 배출권’이다. 말 그대로 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다. 조금 과장하면 탄소 배출권 구매만으로도 탄소중립이 가능하다. 이를 두고 ESG 업계는 공방을 벌여왔다. 과연 탄소 배출권이 실질적인 ‘탈(脫)탄소화’를 이끌 수 있느냐는 논의였다. 지금까지는 ‘옹호론’이 힘을 받았다. 기업 현실을 고려하면 탄소 배출권 사용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된다. ESG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기관 중 하나인 ‘과학 기반 감축 목표 이니셔티브(Science-based Target Initiative·SBTi)’가 보고서를 내고 “탄소 배출권은 탈탄소화 달성에 효과적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지적하면서다.
영향력 크고 ‘가이드라인’ 발표 앞둬
SBTi 보고서가 주목받는 것은 SBTi의 ESG 분야 지위 때문이다.
SBTi는 2014년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와 UN글로벌콤팩트(UNGC), 세계자원연구소(WRI),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이 공동 설립했다. 사실상 기업 탄소 배출 부문 측정과 관리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기관이다. ESG가 화두로 떠오른 뒤 SBTi 가입을 자본 조달 조건 등으로 내세우는 정부와 단체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행정부다. 2022년 11월 행정명령 이행을 위한 연방 조달 규정 개정안 초안을 공개했는데, 티어 3로 분류되는 계약 규모 5000만달러(약 680억원) 이상 기업은 SBTi를 통해 기후 관련 과학 기반 목표를 승인받도록 했다. SBTi 참여 방식은 단순하다. 기업은 2년 내 SBTi 기준에 부합하는 목표를 만들겠다고 서약한다. SBTi는 기업이 제출한 목표 계획서를 검증해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SBTi에 따르면 목표 승인 기업은 2021년 기준 1083개에서 2022년 2080개, 2023년 4205개로 늘었다.
ESG 분야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SBTi의 최근 목표는 새로운 기업 탄소 배출 가이드라인 제작이다. 이른바 넷제로 스탠더드 프로젝트. 2025년 발표 예정인데, 그간 잘 다뤄지지 않던 기업 스코프 3 탄소 배출을 겨냥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얘기다. 스코프 3는 제품 생산에서 발생하는 직간접 탄소 배출(스코프 1·2)을 제외한 모든 탄소 배출을 뜻한다. 협력사 등 공급망에서 내뿜는 탄소도 스코프 3다. 지금까진 측정조차 쉽지 않아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이 없었는데 이를 바로잡겠다는 게 SBTi 목표다. 기업들은 난처하게 됐다. 스코프 1·2는 기업의 직접적 통제 아래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스코프 3는 협력사 등과 협의가 필요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업이 쓸 수 있는 당장의 스코프 3 해법은 탄소 배출권 구매를 늘려 탄소 배출을 상쇄하는 전략뿐이다. 문제는 SBTi가 이를 허용 안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SBTi는 지난 7월 30일 자사 홈페이지에 넷제로 스탠더드 프로젝트 중간보고서 형태인 ‘기술 평가 보고서’를 내놨다. 탄소 배출권과 탈탄소화의 관련성·효과 등을 다뤘다. 결론만 놓고 보면 SBTi는 탄소 배출권을 활용한 기업의 ‘탄소 상쇄 전략’ 효과에 의문을 던졌다.
SBTi가 인용한 논문 중 하나는 “2000개 넘는 상쇄 프로젝트를 검증한 결과 탄소 배출권 활용 시 실질적 탄소 감축 정도는 12% 수준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또 SBTi는 탄소 배출권 사용이 오히려 탈탄소화를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시했다. 탄소 배출권이 일종의 기업 ‘그린 워싱(친환경 위장 전략)’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SBTi 최고 기술 책임자인 알베르토 카릴로 피네다는 “가이드라인 초안을 만드는 과정이고 중간보고서는 단순히 설명일 뿐 지침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도 “SBTi는 (탄소 배출권이 아닌) 직접적인 탄소 감축이 기업 ESG 전략의 우선순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SBTi는 올해 4분기 넷제로 스탠더드 프로젝트 초안을 공개하고 2025년 최종안을 내놓겠다는 방침이다.
3개월 만에 말 바꾼 SBTi
발표 당일 탈퇴 기업 등장
SBTi가 내놓은 중간보고서를 두고 업계에 불만이 팽배하다. 단순히 SBTi가 탄소 배출권을 두고 비판적 시선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최근 몇 달 새 탄소 배출권 관련 입장을 번복해 혼란만 야기했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번 보고서 내용은 지난 4월 SBTi 이사회가 제시한 입장과 정반대다. 당시 SBTi 이사회는 탄소 배출권 사용에 옹호하는 태도를 취했다. 스코프 3를 언급하며 환경속성인증서(EAC) 등 탄소 배출권을 이용한 상쇄 전략을 탄소 감축 성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고려하면 3개월 만에 말이 바뀐 셈이다.
이유가 뭘까. 관련 업계는 내부 반발을 견디지 못했다고 풀이한다. 지난 4월 이사회 발표 직후 SBTi 직원들은 일제히 성명문을 냈다. 비판 논리는 간단했다. 이사회가 SBTi 산하 기술위원회 지침을 따르지 않고 일방적으로 탄소 배출권 관련 입장을 발표했다는 것. 직원들은 “이는 기관 평판을 위협하는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루이즈 아마랄 최고경영자와 이사진은 사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 단체들도 날을 세웠다. “기업 입김에 의한 발표문”이라며 SBTi 이사회를 압박했다. 결국 루이즈 아마랄 최고경영자는 사임했다. 아마랄은 “개인적 이유로 그만두게 됐다”고 밝혔지만 블룸버그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지난 4월 이사회 발표가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SBTi 신뢰도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기업은 SBTi 참여를 재검토하거나 탈퇴를 고민 중이다. 실제 사례도 등장했다. SBTi 중간보고서가 발표된 7월 30일 당일 뉴질랜드 국영 항공사 ‘에어뉴질랜드’는 SBTi 탈퇴를 선언했다. 그렉 포란 에어뉴질랜드 최고경영자는 “(넷제로)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요인들이 있는데, 해당 요인이 기업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며 “당장 전 세계적 공급망 이슈로 연료 효율성이 높은 신형 기재 확보도 장담하기 힘들어 목표 달성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며 SBTi 탈퇴 의사를 밝혔다. 탄소 배출권 등급평가기관 비제로카본의 토마스 리켓 대표는 “기업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사라진 채 방치됐다”며 “앞으로 기업이 SBTi 인증 체계에서 이탈하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탄소 배출권 시장 관계자들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SBTi 판단에 따라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 일단 지난 4월 발표 이후 예상한 수요 확대는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초 블룸버그NEF는 탄소 감축 인정 범위가 스코프 3로 확대되면 2050년 연간 탄소 배출권 수요가 1조1000억달러(약 1523조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 SBTi가 탄소 배출권을 두고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 탄소 상쇄 전략을 포기하는 기업이 늘 수도 있다. 실제 구글은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 탄소 제거 전략을 바꾼다”며 탄소 배출권 활용을 줄이고 직접적인 탄소 배출 감축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3호 (2024.08.21~2024.08.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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