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아가씨, 계속 마주쳤다…이 'KGB 미인계' 깨버린 역공

2024. 8. 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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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미인계 스파이전 〈하〉


1959년 10월 모리스 드진 소련 주재 프랑스 대사는 모스크바의 한 문화 행사장에서 초면의 소련 여성 라리샤와 인사를 나눴다. 미모의 라리샤는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다”며 “자주 뵙고 싶다”고 했다. 드진 대사에게 이런 인사는 흔한 일이라 미소로만 답했다. 그런데 이 가벼운 인사가 대사직 사임을 몰고 올 미인계 정보전의 시작이었음을 꿈에도 몰랐다.

대사직 사임으로 조용하게 마무리

구소련 영화배우 라리샤 크론베르크. 프랑스 대사 드진을 유혹해 포섭하는 KGB ‘지골로 작전’에 가담했다. [중앙포토]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드진이 주소련 대사로 부임하자 그를 포섭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했다. 드진은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드골 대통령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그를 포섭할 경우 정보적 가치는 물론 전략적 가치도 기대됐다. 평소 드골은 프랑스가 중심이 된 유럽이 미국과 소련을 중재하고 견제하는 ‘제3세력’이 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드골의 절친인 드진 대사를 잘 이용할 경우 미국과 유럽의 균열을 유도할 수 있다고 봤다. 이에 KGB는 드진 대사를 미인계로 포섭하기 위한 지골로 작전(Operation Gigolo)에 착수했다.

지골로 작전 이후 드진 대사의 일상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사관 근처 서점, 카페 등 어디를 가든 라리샤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우연이 반복되면서 인사가 편해졌고 대화도 깊어졌다. 프랑스와 러시아 문학을 비교하는 지적인 대화에서 시작해 개인적 고민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아주 자연스레 드진은 라리샤에게 연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KGB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이제 결정적 함정을 파는 일만 남았다.

1960년 6월 라리샤는 프랑스 요리를 배웠는데 한번 맛보지 않겠냐며 드진 대사를 집으로 초대했다. 흔쾌히 응한 드진대사는 라리샤의 집에서 밀애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은 KGB가 설치해 놓은 카메라와 마이크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KGB의 지골로 작전이 성공하는 듯했다.

드골의 친구로 소련 주재 프랑스 대사를 지낸 모리스 드진. [중앙포토]

그러나 KGB는 드진 대사를 안이하게 판단하는 실책을 범했다. 미인계의 덫에 걸린 것을 알아차린 드진 대사는 KGB의 협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요구를 들어주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드진 대사는 KGB가 더 이상 협박하지 못하도록 모든 사실을 프랑스 정부에 먼저 자백해 버리는 역공을 취했다. 완벽해 보였던 KGB의 계획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1964년 드진은 조용히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지골로 작전은 1985년 소련의 공개로 세상에 드러났다.

현대의 미인계 정보전은 여성의 개인적 능력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눈여겨 볼 것은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이 과감하게 자백하여 협박에서 벗어나는 사례들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85년 소련 주재 미 대사관의 경비담당인 론트리 해병대 하사에 대한 미인계 사건에서 또 한번 입증됐다. 이번에는 KGB가 비교적 하급직원인 해병대 하사를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비록 계급은 낮지만 대사관 내부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고위 외교관에 비해 의심을 피할 수 있으며, 혈기왕성한 청년이기 때문에 미인계가 쉽게 통할 것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이를 위해 KGB는 미 대사관에서 잠시 영어 번역업무를 한 적이 있는 25세의 여성 비올레타를 투입했다.

간첩법 위반 혐의로 미국 해병으로는 유일하게 기소된 클레이튼 론트리. [중앙포토]

비올레타는 1985년 여름 모스크바 근교 공원에서 산책하던 론트리와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친구가 되었다. 첫 만남 이후 비올레타는 론트리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빠르게 연인 관계로 발전시켰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밀애를 갖는 일도 잦았다. 그러는 사이 론트리는 비올레타의 위장된 사랑에 푹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올레타는 자신의 ‘삼촌’이라며 론트리에게 KGB요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 순간 론트리는 KGB의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KGB도 론트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미국대사관의 내부정보를 요구했다. 비올레타의 사랑에 속박된 론트리가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론트리는 미국 대사관의 내부 구조와 보안취약점은 물론 대사관내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신원 등 기밀사항을 넘겼다. 당시 CIA의 소련 내 정보활동이 번번이 실패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음이 후일 밝혀졌다.

론트리를 포섭하는데 동원된 러시아 여성 비올레타 세이나. [중앙포토]

날이 갈수록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론트리는 1986년 12월 모든 것을 자백하기로 결단하고 미국 당국에 자신의 실책을 빠짐없이 진술했다. 론트리의 자백으로 미국은 대사관의 보안 시스템을 변경하고 CIA의 소련내 정보활동을 잠정 중단하는 등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론트리에게는 가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1987년 8월 17일 미 군사법원은 그에게 30년 형을 선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론트리의 용기있는 자백이 관심을 받으면서 감형 논의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비록 론트리가 간첩행위를 저질렀지만, 극형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자백해 더 큰 피해를 막았고 금전적 대가를 위한 파렴치한 범죄도 아니었으며, 범죄의 주 원인은 낮선 이국땅에서 외로움에 처한 청년의 상사병이었던 만큼 감형해 주는 것이 옳다는 요지였다. 1989년 알프레드 그레이 해병대 사령관이 앞장서 감형을 청원했다. 법원도 이를 수용해 15년형으로 감형 판결했다 (United States v. Lonetree 판결). 론트리 사건은 미인계 정보전으로 인해 파탄난 한 청년의 인생에 대해 법적 관용과 인간애를 보여준 이례적 사건이기도 했다.

권위주의 국가들 미인계 적극 활용

정보전쟁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즈음 미인계 정보전의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논란이 일기 시작한 점이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조종해 국가안보에 이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2000년대 들어 이러한 논란이 더욱 확대되자 부담을 느낀 정보당국은 미인계 사용에 신중해졌다. 특히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국·영국·캐나다 정보기관의 고위 관계자들은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감정을 이용한 정보활동은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정보학의 석학인 마크 로웬달이 “과거 용인됐던 정보활동이 오늘날 윤리적 기준에 맞지 않아 법적·정치적으로도 많이 위축되고 있다”고 진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 같은 윤리적 딜레마는 미인계 정보전의 지형변화까지 몰고 왔다. 윤리적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권위주의 국가들은 미인계 정보전을 공격적으로 사용하는데 반해, 여론과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방어하는 입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정치체제에 따른 미인계 정보전의 불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서방 정보기관들이 중국과 러시아의 미인계 정보전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고 공개 경고하고 있는 것은 방어전의 일환이다. 적극적으로 알려 시민사회 전체가 감시하고 방어하자는 전략이 숨어 있다.

영국 속담에 ‘마음을 빼앗기면 눈은 아무것도 못 본다’는 말이 있다. 마치 미인계 정보전의 본질을 말한 것 같다. 미인계 정보전은 사랑 이외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무서운 마법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은 월나라가 보낸 서시(西施)의 미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인은 나라도 기울게 한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오늘날 미인계 정보전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중이다. 현실 공간 뿐 아니라 사이버 공간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틴더(Tinder), 바두(Badoo) 등 인터넷 데이팅 앱에서 가짜 여성이 공무원이나 군인들을 유혹해 정보를 탈취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가지 정보 활동과 관련한 논란으로 우리 사회가 어수선하다. 이럴 때일수록 혼란이 증폭되지 않도록 세심한 정보 관리가 필요하다.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의 미인계 공격에 대한 서방의 경고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강 건너 불로 여겼다가는 또다른 실패를 겪게 될 수 있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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