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버티는 게 답일까?” 은둔청년 소통창 ‘두더지땅굴’

황민주 2024. 8. 2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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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은둔 청년 위한 온라인 플랫폼, ‘두더지 땅굴’
일상 공유하고 고민 털어놓는 소통 공간
“단절됐던 청년들이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이지훈(가명·36)씨가 '두더지 땅굴' 게시판에 자신이 올린 글을 보고 있다. 황민주 인턴기자


“버티는 게 답일까?”

은둔 생활만 세 번째인 이지훈(가명·36)씨는 최근 한 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남겼다. 이 악물고 버텨내는 일상의 답답함을 토로한 그의 글에 답글이 달렸다.

“버티느라 애쓰고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아는 노래가 많지 않아 ‘그냥 살아’라는 노래 영상 하나 추천드립니다.”

두더지 땅굴을 이용하는 청년들이 게시판에 익명으로 고민거리를 올리거나 하루 일과를 공유하고 있다. 두더지땅굴 홈페이지 캡처


지훈씨가 이야기를 털어놓은 곳은 은둔 청년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 ‘두더지 땅굴’이다. 2022년 8월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두더지 땅굴은 사단법인 씨즈가 땅 속으로 파고 들어 숨은 듯한 은둔 청년들을 연결하자는 취지로 만든 온라인 소통 창구다.

온라인 ‘땅굴’을 찾아 든 청년들은 각자의 이름과 얼굴은 몰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서로의 친구가 된다. 본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말하기 힘든 고민을 익명으로 꺼내고, 도움이 될 만한 지원 프로그램을 나누고, 때론 직접 만든 창작물을 올린다.

‘땅 밖’ 살 힘을 찾아준 ‘땅굴’

지훈씨가 처음 두더지 땅굴을 찾은 건 지난 2월이다. 현재 세 번째 자립을 시도하고 있는 그는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곳 게시판을 방문한다.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보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며 힘을 얻고, 말로 하기 힘든 속마음을 끄적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두더지 땅굴 게시판에 남긴 글을 읽고 있는 지훈씨. '은둔이라는 관성'이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와닿아 생각날 때마다 종종 읽어본다. 황민주 인턴기자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훈씨는 학창시절 따돌림을 당하면서 깊은 상처를 얻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해 재적 처분을 받았다. 계속된 상실감에 완전히 위축된 그는 결국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기를 결심했다.

다시 사회에 발을 내딛기로 한 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고 나서다. ‘이대로는 정말 안되겠다’ 싶어 군입대도 하고 일자리도 구해봤다. 하지만 자신감을 잃은 상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의 불안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지훈씨를 다시 방으로 몰아넣었다.

그랬던 지훈씨에게 두더지 땅굴은 ‘버팀목’으로 다가왔다. ‘땅 위’ 세상에서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던 그는 이 땅굴에 올린 자신의 글에 남겨진 정성스런 댓글에서 세상에 발을 내딛을 힘을 얻고 있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웠던 지훈씨는 이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에 조금씩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본인이 올린 일상글에 좋아요가 얼마나 달렸는지, 어떤 새로운 댓글이 있는지 습관처럼 들어가 확인하고 있다. “많은 분들한테 응원을 받으니까 거기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연결이 주는 힘

“어쨌든 저와 비슷한 처지인 분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니까요. 왜 은둔하고 고립했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준다는 게 좋아요.”

김민수(가명·39)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두더지 땅굴 게시판에 네컷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본인의 은둔 경험부터 청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만화에 담고 있다.

김민수(가명·39)씨가 은둔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아 게시판에 올린 네컷만화. 민수씨는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보면서 힘을 얻고 있다. 두더지땅굴 홈페이지 캡처


활동명은 ‘선비’. 아침 일찍 일어나 학문에 몰두하지만, 실질적인 생산활동은 하지 않는 선비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 붙인 별명이다.

민수씨의 은둔 생활은 네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처음 은둔 생활에 접어든 건 매진했던 고시 공부에 한계를 느끼면서다. 은둔·고립의 정의도 없던 10여년 전, 신림동 자취방에서 그는 서서히 외톨이가 됐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문밖에 발을 디뎌보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실패에 경제적 어려움마저 겹쳐 금방 다시 고립에 빠졌다.

세상과 단절됐던 민수씨를 움직인 건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내면의 목소리였다. 이제는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해 처음으로 서울시 은둔·고립 지원 사업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두더지 땅굴 플랫폼을 알게 됐다.

혼자 있는 시간에 취미로 그리던 만화를 이제 두더지 땅굴 게시판에도 연재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올리면 그 내용에 공감한 누군가는 댓글로 반응을 남긴다.

사람들이 쓴 댓글에 민수씨는 ‘자기효능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사회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사람인데, 주류는 아니어도 ‘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아요.”

“웹툰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댓글은 민수씨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했다. 응원의 말들이 마음에 쌓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눈길을 돌려볼 여유도 생겼다.

자신의 전공 지식을 쉽게 풀어 매주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손민주(23)씨. 황민주 인턴기자


손민주(23)씨도 지난 6월부터 자신이 그린 웹툰을 두더지 땅굴에 연재하고 있다. 간호학과를 다니다 휴학 중인 민주씨는 본인의 내면이나 의학 지식을 주제로 웹툰을 그리고 있다.

민주씨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고 한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찾았고,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았다.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아무도 민주씨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자신이 용기내 먼저 말을 꺼내도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사람과의 관계 유지가 어렵다보니 아르바이트 하나 구하는 것도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3학년 2학기 재학 중이던 지난해 가을 휴학을 결심했다.

지능지수(IQ)가 137인 민주씨는 “차라리 지능을 100으로 낮추고 사회성이 37 더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민주씨가 최근 두더지 땅굴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웹툰을 공유할 때만큼은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어서다.

그는 꾸준히 웹툰을 연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관심이라는 걸 받아보고 싶은 거 같아요. 제발 날 좀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요”라고 말했다. 이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줘서 감동받았습니다’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같은 댓글들을 볼 때 “‘누군가에게는 내 그림이 위로가 되는구나’ 싶어 한껏 뿌듯해진다”고 전했다.

“땅 속 ‘두더지’가 파는 땅굴이 연결돼 땅 밖으로”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 고립·은둔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80.8%가 ‘고립·은둔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67.2%는 실제 탈 고립·은둔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로 나오려는 이들의 시도 상당수는 실패한다. 재고립·은둔 경험이 있는 이들은 45.6%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씨즈 이은애 대표는 은둔·고립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청년들 간 ‘연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고립은 나와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기에 본인을 더 가치없는 존재로 느껴지게 할 수 있다”며 “단 한 명이라도 괜찮으니 어떻게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두더지땅굴 홈페이지 캡처.

두더지 땅굴의 목표는 땅 속에 웅크리던 청년들이 자립을 결심했을 때 그들의 땅굴과 세상을 연결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 대표는 청년들이 이 땅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던 두더지가 땅굴을 파면서 다른 두더지들이랑 연결되잖아요. 우리 청년들이 지금은 땅 속 깊숙이 혼자 있더라도 땅굴로 서로를 연결하다 보면 땅 밖으로 나올 수 있겠죠. 그런 사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망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황민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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