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 때문에 '빅토리' 봤는데... 안 봤으면 어쩔 뻔했나요

이진민 2024. 8. 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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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빅토리>

[이진민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장가 암흑 시대에 영화 <빅토리>가 고전하고 있다. 주연 배우 이혜리는 개인 SNS를 통해 "빅토리 진짜 재밌는데 선택을 많이 못 받아서 속상하다. 어떻게 하면 선택받을 수 있을지"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개봉 상영관이 많지 않은 데다 나온 지 겨우 일주일이 되었는데 벌써 영화를 내린 곳도 많다. 그러나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며 'N차 관람'을 인증하는 관객들이 늘고 있다.

관람평이 극과 극이었다. 누군가는 '청춘 영화'라 정의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항 영화'란다. 의아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소녀들을 만났다. 춤추기 전까지는 살아있지도, 제대로 말해본 적도 없는 소녀들을. 유약하며 불안한 세상을 향해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아무도 응원하고 싶지 않다면서 목터져라 구호를 외친다. 그들은 춤을 췄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기어코 밀레니얼의 마지막 소녀가 되지 않기 위해.

소녀들은 아빠를 파업하게 했다
 거울을 훔쳐서 연습실을 만든 '밀레니얼 걸즈'
ⓒ 마인드마크
영화 <빅토리>는 얼핏 보면 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하다. 고난에 처한 미성년이 춤을 통해 자기 세계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더 먼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는 춤은 다르다. 빌리는 발레를 췄다. 그는 홀로 고고하게 무대를 거닐었다. 관객은 천재적인 빌리의 모습을 감상하고 끝내 박수를 보낸다. 춤추는 빌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만질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빅토리>의 소녀들은 치어리딩을 춘다. 치어리딩의 목적은 응원이다. 타인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춤이지만, 소녀들의 세계에는 '타인'이 부재하다. 그들은 온통 '지' 생각뿐이다. '필선(이혜리 분)'은 힙합을 연습할 공간이 필요해서 명목상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었다. '세현(조아람 분)'은 '필선'과 '미나(박세완 분)'의 협박에 마지못해 동아리에 가입했다. 뒤따라 가입한 소녀들은 필선의 멋있는 공연에 끌렸을 뿐,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서 '치어리딩'에 뛰어든 건 아니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치어리딩이 통할 리가 없다. 그들은 축구부 경기에서 첫 공연을 제대로 망친다. 연습 부족은 핑계다. 누군가를 간절히 응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치어리딩은 화려한 기교에 불과하다. 그들은 경험을 쌓고자 이곳저곳에서 치어리딩을 시작한다. 시장판, 회사 야유회, 아는 지인이 불러준 자리라면 어디든 팔을 곧게 뻗는 '밀레니얼 걸즈'다.

여러 무대를 거치며 그들은 관객의 눈을 바라보게 된다. 자신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신나 하며 에너지를 얻는 관객을 보자 치어리딩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춤추는 나를 보며 당신은 에너지를 얻고, 그런 당신에 내가 다시 에너지를 얻는 알쏭달쏭한 물리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자 소녀들은 점점 힘차게 치어리딩을 했고 관객과 경계 없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조선소. 그곳에선 필선과 '소희(최지수 분)'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다. 현장은 삭막하다. 더 나은 노동환경을 요구하고자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 띠 두른 어른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녀들은 주특기를 꺼냈다. 신나는 치어리딩으로 분위기를 엎고 노동자들과 어울려 춤판을 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위자들은 밝았지만, 필선의 아버지 '우용(현봉식 분)'만은 그렇지 못하다.

그는 현장 반장으로서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역할이다. 어쩔 수 없이 시위를 막지만, 참가자 명단을 넘기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우용은 먹고 살기 위해 동료들을 저버렸다. 하지만 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춤을 추면서 동료를 찾았다. 치어리딩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필선을 보며 우용도 변화한다. 어느새 그는 시위장에 찾아가 "나도 하나 달라"며 띠를 두른다.

<빌리 엘리어트>에선 빌리가 계속 춤출 수 있도록 아버지와 형이 파업을 접고 탄광에 나간다. 하지만 <빅토리>에선 소녀들의 춤이 아버지들을 다시 시위장으로 돌린다. 그들은 부당한 회사에 맞서고, 시위하며 아버지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치어리딩'을 통해 말한다. 철학자 니체는 '중력의 악령'에게 지배받지 않고 나다운 삶을 살려면 춤을 춰야 한다고 말했다. <빅토리>의 치어리딩은 니체가 말하는 '춤'과 같다. 나를 끌어내리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춤을 춰야 한다.

필선은 시대와 불화한다
 영화 <빅토리>의 필선
ⓒ 마인드마크
극을 이끄는 인물 '필선'은 이혜리가 연기한다. 그는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 역할로 신드롬을 일으켰으나, 배우로서 극복해야 할 '이미지'가 생긴 셈이기도 했다. 왈가닥하고 장난기가 많은 건 두 역할 모두 매한가지다. 하지만 필선은 덕선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설계된 인물이다.

덕선은 낙천적인 성격으로 주변 인물들과 우호적이며 어딘가 틱틱거리지만, 결코 반항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게다가 유일한 흠인 '전교 999등'조차 훗날 승무원이 되며 지워버리게 된다. 시작은 차별받는 둘째였지만, 결과적으로 덕선은 남들이 부러워할 법한 안정적인 세계에 안착한다.

필선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거제를 끊임없이 비좁아하는 인물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요동치지만, 그에게는 도와줄 어른이 없다. 선생님들은 필선을 문제아로 낙인찍었고 아버지는 돈 벌기에 바쁘다. 막연하게 유명한 댄서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다. 사랑스러운 말투였던 덕선과 달리, 필선은 투박하게 말하고 좋아하는 춤 장르도 힙합이다.

필선은 활어 같은 인물이다. 끝까지 도마 위에서 썰리지 않고 바다에서 헤엄친다는 점에서 감탄하게 한다. 모종의 사건으로 퇴학당한 필선은 좌절하지 않고 댄서의 꿈을 이루고자 서울에 간다. 댄스팀에 합격하고 걸그룹 오디션까지 제안받은 시점에 필선은 모든 걸 접고 다시 거제에 간다. 그곳에는 끝마치지 못한 '치어리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돌아온 필선은 "그래도 서울 가서 즐거웠다"며 돌아오는 것도 용기가 아니냐며 떳떳함을 잃지 않는다.

필선의 궤도는 비틀거린다. 치어리딩 팀원들과 불화하고, 선생님과 불화하고, 자신이 속한 세상과 불화하며 흔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확장한다. 필선은 꿈에 그리던 서울을 가봤고 댄스팀에도 들어갔지만, 자신이 원하는 춤을 위해 거제로 돌아온다. 무엇을 꿈꾸든 "여자애가 무슨"이라 말하며 커피 심부름시키는 1999년, 그 시대에 눌리지 않은 소녀의 삶은 너무나 선명하고 반짝인다.
 <빅토리> 출연진의 모습
ⓒ 이혜리 SNS 계정(@hyeriherihey)
극장가 암흑 시대에 영화 <빅토리>는 부진을 겪고 있다. 이에 이혜리를 필두로 주연 배우들은 게릴라 무대인사와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자극적인 것이 이기는 시대에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어리딩 이야기에 청춘 스포츠와 산업화 시대의 비극을 더했다고 하면 되려나.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평범한 모래사장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조개껍질과 마모된 유리 조각이 있었다고. 그것들을 엮는 재미와 발이 푹푹 빠지는 감각이 좋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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