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마법의 뺑뺑이가 있다면

박지훈,미션탐사부 2024. 8. 2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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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미션탐사부 차장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이것만 설치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말에 지구촌 전체가 속고 말았다. ‘플레이 펌프’라는 이름이 붙은 이것은 한때 웬만한 놀이터엔 다 있던 놀이기구 뺑뺑이와 비슷했다. 재미 삼아 기구를 돌리면 그 회전력으로 지하수를 물탱크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마법의 뺑뺑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펌프를 보급하기 위해 래퍼 제이지는 순회공연에 나섰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은 “뛰어난 혁신”이라고 치켜세웠다. 폭포처럼 쏟아진 후원금 덕분에 펌프는 2009년까지 아프리카 곳곳에 1800대나 설치됐다. 하지만 이 펌프엔 문제가 많았다. 1시간에 길을 수 있는 물의 양이 수동 펌프의 5분의 1밖에 안 됐다. 설치비는 4배나 비쌌다. 관리비 마련을 위해 물탱크 옆에 설치한 광고판도 별 쓸모가 없었다. 구매력 낮은 아프리카인을 타깃으로 광고를 할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플레이 펌프는 아프리카의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플레이 펌프는 언젠가부터 온정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증거, 무분별한 선행의 상징, 묻지마 기부의 잘못된 사례로 알려지게 됐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벌이는 다양한 캠페인은 어떤가. 거기에도 마법의 뺑뺑이가 있지 않을까.

교계에서 하는 온갖 프로젝트를 마주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뒤숭숭한 분위기를 풍기며 방치돼 있을 플레이 펌프를 떠올려보곤 한다. 겉보기엔 반들반들 흠집 없는 캠페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카드로 지은 집처럼 위태롭게 여겨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거의 매주 대형교회 예배당에서, 때로는 특급 호텔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예배,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가 잇달아 열리는데 그것들이 훗날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는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성도들의 귀한 헌금이 투입되지만 그 돈을 표나게 쓰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나 할까.

한국교회 선행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것은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방제 작업에 나선 전국 성도들의 자원봉사 행렬인데 이것도 비틀어서 생각하면 지난 십수 년간 교회가 본때 있게 돈을 쓴 일이 이때 말고는 거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자신할 수 있는가. 엄정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표현을 마뜩잖게 여기는 이가 많겠지만 성도는 교회가 제공하는 ‘종교 서비스’의 소비자다. 마트에서 치약 하나를 사면서도,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캔을 구입하면서도 품질과 쓸모를 고민할 사람들이 유독 헌금할 땐 그 돈이 언제, 어떻게, 어디에, 얼마나 쓰일지 따져보지 않는다. 헌금에 ‘계산적 이성’이 개입하는 건 불경스럽다고 여기는 것일까.

르완다는 1994년 내전으로 쑥대밭이 됐다. 제임스 오르빈스키는 당시 이곳에 작은 병원을 열었다. 환자는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누구부터 살려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결국 그는 ①~③이라는 숫자가 적힌 테이프를 준비했다. ①은 즉시 치료, ②는 24시간 내 치료, ③은 치료 불가능을 의미했다. 의료진은 ①과 ②에 속하는 환자를 살리는 일에 몰두했다. ③이라는 테이프를 이마에 붙인 이들은 응급실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최대한 편하게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왔다. 담요를 덮어줬고 모르핀을 투여했다.

오르빈스키의 이야기는 선행을 실천할 때도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한국교회의 위기 운운하는 말들의 배경을 살피면 결국 그것은 돈의 문제와 연결될 때가 많다. 교회들은 무슨 일을 벌이고 싶다면 돈을 거기에 쓰는 게 맞는지, 얼마가 적당한지, 그것이 ‘선(善)의 최대화’를 이룰 수 있는지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성도들도 감시자의 역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신은 주기만 할 뿐 나눠주지는 않는다”는 아이티의 격언처럼 나눔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영역이니까.

박지훈 미션탐사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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