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그 바다에 대륙세력 나타났다…남양 해역의 역사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4>]
근대세계의 역사 전개에서 유럽의 역할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근대역사학이 유럽인의 손으로 빚어진 사실이 그 위에 겹쳐져 유럽중심주의가 오랫동안 역사학계를 풍미했다. 유럽중심주의는 근대사에서 유럽의 역할 중시를 넘어, 근대 이전의 역사까지도 ‘유럽적’ 기준에 따라 재단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럽 언어들과 가까운 산스크리트어 덕분에 인도문명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느니, 중세 유럽과 비슷한 봉건제가 근대일본 발전의 근거였다느니 하는 식이다.
유럽중심주의의 폐단이 동남아 역사에서 특히 심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국가’ 때문이다. 근대유럽의 역사 인식에서 국가의 역할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을 국경의 힘이 약해진 21세기 상황에서 돌아볼 수 있다. 동남아는 문명 수준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작은 지역이었다는 특성 때문에 국가를 중시하는 유럽중심주의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1970년대부터 ‘수정주의(revisionism)’를 표방한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나왔던 민족주의도 함께 넘어서려는 노력이었다. 이제 그 성과가 쌓여 ‘수정’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관에 접근하고 있다. 동남아가 이 새로운 역사관 형성의 현장이 되는 것은 역시 국가의 역할이 작았던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양은 비어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서세동점’은 유럽중심주의의 한 표현으로 해양활동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 현상이다. 포르투갈함대가 16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시아 해역의 해양활동은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유럽세력에게 장악되면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인이 인도양 진입 후 불과 십여 년 만에 광역 항로체계를 구축하고 동남아 해역까지 진입한 사실만 보면 유럽의 힘이 압도적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홍해-페르시아만 일대를 제외하고는 포르투갈인이 공략한 항구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함락되었고, 인도양을 항해하는 배들은 포르투갈인의 통제를 받거나 힘들여 피해 다녀야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의 실제 통제력 수준에 수정주의 연구자들은 의문을 제기해 왔다. 포르투갈인이 인도양 제해권을 추구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향료 공급로의 독점이었다. 홍해-페르시아만의 이슬람세력을 통해 베네치아로 향하던 공급로를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은 이뤄지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향료시장에서 오랫동안 포르투갈과 경쟁을 계속했다. 백 년 후 네덜란드인이 공급로 대신 공급원의 봉쇄로 정책 방향을 바꾼 것은 그 때문이었다.
16세기 인도양에서는 여러 크기 여러 형태의 선박이 다양한 항로를 따라 운항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이슬람세력을 주적(主敵)으로 여기고 이슬람 선박과 이슬람 항구의 격파에 주력했으나 이 표적은 정확하지 못했다. 동남아는 물론이고 인도에서도 이슬람이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유럽인 도착 전의 남양 해양세계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고 이슬람은 최근 도착한 외래세력이었다. 유럽세력은 이 흐름에 더해진 또 하나의 변수일 뿐이었다.
남양인의 독무대였던 인도양과 남양 해역
동남아에 관한 기록이 중국과 로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기원 전후 시기에는 인도양과 동남아 해역이 남양인의 독무대였다. 동-서아시아의 대륙문명은 수상활동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강과 호수 등 내수면이나 연안의 교통과 수송이 약간 필요했을 뿐이다.
대륙의 농업문명이 대륙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인도양에서 태평양에 걸친 광대한 해역의 주인공은 남양어(Austronesian languages)를 쓰는 남양인이었다. 대륙인이 이웃 동네에 가려고 고개를 넘어야 했다면 남양인은 바다를 건너야 했다. 일상생활부터 배를 활용한 남양인은 작은 배로 큰바다를 누비는 독특한 조선술과 항해슬을 발전시켰다.
대륙인과 남양인의 초기 접촉은 남양인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5-8세기 중국 승려들의 구법(求法) 여행기 중 해로를 취한 경우는 남양인의 배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법현(法顯, 337-422)은 399년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갔다가 412년 해로로 귀국했고, 673년에서 695년까지 인도 등지에 체류한 의정(義淨, 635-713)은 왕복에 모두 해로를 이용했다.
법현의 귀로는 여간 험하지 않았다. 상선을 타고 스리랑카를 떠났다가 폭풍을 만나 다른 섬(자바?)에서 반년 지낸 후 다시 광저우(廣州)를 향한 배를 탔고, 그 배도 수십 일간 표류하다가 겨우 육지에 닿았는데 알고 보니 엉뚱한 칭다오(靑島) 부근이었다고 한다. 5세기 초까지도 해로여행이 매우 불안하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의정이 여행한 7세기 말에는 남양 해로가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수마트라섬 팔렘방에 체류 중이던 689년 필묵(筆墨)을 구하러 광저우에 잠깐 다녀갔다고 한다. 인도 승려 선무외(善無畏, 637-735)는 80세가 되던 716년에 인도에서 장안으로 왔다. 720년대에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혜초(慧超, 704-787)도 떠나기 전에 광저우에 있었으므로 가는 길은 해로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돌아온 길은 육로로 그려져 있다.)
해상활동을 시작한 아시아 대륙세력들
의정이 인도로 가기 위해 광저우에서 탄 배가 파사(波斯) 상선이었다고 하는데, ‘파사’를 통념대로 페르시아로 보기 어렵다. 7세기 말 시점에 페르시아 상선을 인도-중국 항로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없다.
앙드레 윙크의 〈알-힌드, 인도-이슬람 세계의 형성 Al-Hind, the Making of the Indo-Islamic World〉(2002)에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말레이반도의 한 지역이 그 시기에 중국에서 ‘파사(波斯)’라는 이름으로 통했다는 것이다.(48-49쪽)
페르시아 상선이 중국에 나타난 것은 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말레이반도 주민들이 중국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상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 해서 ‘파사’란 이름이 붙게 된 것 아닐지. 유리 공예품 등 파사 상품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파사가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못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량의 사치품이 장거리교역의 대상일 때 해상운송은 남양인의 몫이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사람들은 남양 배가 이따금씩 갖다주는 남양 특산물과 먼 곳의 상품을 받아들이다가 수요가 자라남에 따라 그 배를 얻어타고 남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5-8세기 승려들의 여행기는 그 단계를 보여준다.
10세기 이후 대륙세력의 배가 남양 해역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남양 항로의 분절(分節) 현상이 일어난(중국-이슬람세계 전체 항로를 다니는 대신 중국-동남아 항로와 이슬람세계-동남아 항로를 구분해서 운항하게 된) 이유를 케네스 홀은 〈초기 동남아 역사 A History of Early Southeast Asia〉(2011)에서 물동량의 증가에 따른 항로 전문화 현상으로 설명하는데(39쪽), 나는 다른 이유에 더 끌린다. 늘어나는 대륙세력의 선박이 각자 자기 영역에서 운항하는 관행을 세운 것 같다.
중국인을 놀라게 한 남양인의 배 곤륜박(崑崙舶)
2세기 이후 중국 기록에 “곤륜박(崑崙舶)”이란 배가 나온다. ‘곤륜’은 신비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남양이 흔히 불린 이름이다. 곤륜박은 60여 미터 길이에 6-700명 인원과 1만 곡(斛)의 짐을 싣고 다니는 배로 설명되어 있다. “곤륜”이란 신비로운 이름에 어울리는 엄청나게 큰 배로 그려진 것이다.
유럽인은 중국의 전통적 선박을 통틀어 ‘정크(junk)’라 불렀다. 자바 선박 ‘종(djong, jong)’과 같은 어원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정크 중 북방식은 대개 용골(keel)이 없는 평저선(平底船)이고 남방식은 첨저선(尖底船)이 주종이다. 북방의 연안항해에는 내수면의 선박 형태가 이어진 반면 남방에서는 원양항해를 위해 남양식 조선술을 도입한 것이다.
중국의 남양식 조선술 도입은 송나라 때인 12세기의 일로 추정된다. 송나라는 건국(960) 때부터 북방에서 약세를 보였고 특히 남쪽으로 옮긴(1127) 후에는 더욱 수세에 몰렸다. 그런 상태에서 버티기 위해 송나라는 남방 지역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상교역을 일으켰다. 찾아오는 남양 배에 의존하던 단계를 넘어 중국 배를 내보내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송나라를 석권한(1279) 후 원나라의 몇 차례 남양 정벌 시도는 송나라가 시작한 남방 확장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궤적은 명나라 초 정화 함대의 활동(1405-1433)으로 이어졌다. 그 활동의 중단 이유는 나중에 따로 살펴보겠지만, 당시의 교역 수요에 비해 너무 크게 잡았던 사업 규모를 조정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 둔다.
7세기 이후 말라카해협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해양국가 스리비자야(의정의 여행기에 삼불제(三佛齊)란 이름으로 나옴)가 1025년경 인도 남부 촐라제국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11세기부터 남양 해역에 대륙세력의 진입으로 해상활동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16세기에 진입한 유럽인도 이 변화에 가세한 또 하나의 외부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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