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 한 곡 들은 느낌... 아우슈비츠에서 들린 '이 소리'
[구혜진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한 영화다. 그간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가 생산되어 왔는데, 이 영화가 칸 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소비돼 끔찍함마저 익숙해진 아우슈비츠에 대해 더 신선한 관점이 무엇이었을까. 답은 '소리였다.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를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각적 장치들은 최소화돼 있었다. 이 영화의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은 청각으로 시각은 청각을 보좌한다. 영화가 아닌 긴 현대 음악 한 곡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이상적인 정원의 꽃밭. 주인공 헤트비히와 자녀 |
ⓒ 찬란 |
성실한 군인인 루돌프 회스와 꽃이 만발하도록 정원을 가꾸는데 재능이 있는 아내, 아빠에게 깜짝선물을 준비할 줄 아는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은 수영장이 딸린 그림 같은 2층 집에서 산다. 루돌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이며 집의 위치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맥락을 걷어내면 잡지에 나올 법한 이상적인 모습의 가족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안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리는 데 성공한 부부. 이들은 자신의 왕국에 어울리지 않는 거슬리는 소리의 실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담장을 높이고 집안 전체에 커튼을 드리웠다. 하지만 소리는 담장과 커튼을 개의치 않고 집안 전체에 퍼지며 일상 어디든 파고든다.
사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루지만, 수감된 유대인은 영화 초반 잠시 등장하는 엑스트라가 전부다. 아우슈비츠의 공포와 참혹함은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소리에 실려 있다.
영화 초반에는 핵심이 되는 '소리'를 인식하기 쉽지 않았다. 인물 주위를 감싸는 일상 소음이 보통의 영화보다 더 귀에 들어오지만, 어떤 소리인지 확실히 인지하기는 어려운 정도의 음량이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였지만, 처음에는 인물들 간 대화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돼 일상 소음이 끊이지 않고 귀에 걸리는 것이 거슬렸다. 영화는 그 소음의 실체가 총성, 비명, 울음, 공장 가동 소음,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기차의 소리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챌 수 있게 유도한다. 그때부터 모른 척 하는 게 가능했던 거슬림은 불편함으로 바뀌다가 해결되지 못하는 불편함이 쌓여 고문같이 느껴질 때쯤 영화가 끝났다.
가리고 모른척하며 모두의 합의로 담장 밖과는 철저히 분리된 것처럼 유지하고 있는 그림같은 일상에 담장 밖 현실이 예기치 않게 불쑥 찾아온다. 아이들과 냇가에서 물놀이하며 안온한 한때를 보내다 별안간 손에 쥐게 된 뼛조각의 감촉,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들이마신 검은 연기의 매캐함, 밤잠을 깨운 붉은 화염의 강렬한 빛을 경험하고 나면 내내 거슬리던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쉴 새 없이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 다시 반복' 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
ⓒ TCO㈜더콘텐츠온 |
하지만 끝끝내 불편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우슈비츠 왕국의 왕과 왕비 노릇에 여념이 없는 나치장교 부부는 학살되는 유대인을 가축으로 설정하고 일상을 지켜 내기로 합의한 듯 보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부부의 아늑한 침실에서 다정히 마주 보며 여행 중 마주친 '소'에 대한 추억을 나누고 '돼지' 소리를 흉내 내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리자이며 수용소 반경 40m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다. 유대인과 가축을 동일시하기로 한 것이 타의에 의해 세뇌당한 결과이든 살아남기 위한 자의적 선택이든 그 결정은 일상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직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가축을 도축하는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 내고 그 대가로 그림 같은 일상을 지켜내는 것. 노동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는 훌륭한 모습 아니던가.
부부간에 합의된 가치관 하에 아우슈비츠 옆에 그들의 작은 왕국을 건설하고 잘사는 것만 같은 루돌프 가족도 눈에 띄지 않지만 조용하고 확실히 무너져 내려간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을 거라 짐작되는 아내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삶을 움켜쥐었다는 기쁨과 언제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현실을 알아챈 뒤 말도 섞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의 흔적을 귀찮다는 듯 치워버리고, 남편의 직무가 변경되면서 꿈 같은 정원을 두고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자 남편도 서슴없이 버리며 점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안에 고립되어 간다. 루돌프는 자신이 왕국의 왕이 아닌 그저 도구에 불과했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마음 둘 곳 없이 헤맨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쌓아둔 역겨움을 배설하듯 토해낸다.
▲ 영화 포스터 |
ⓒ 영화사 찬란 |
루돌프 가족을 시원하게 손가락질하며 악마라 칭하고 나는 그들과 다른 존재일 거라 장담하지 못해 불편하다. 아우슈비츠와 같이 인류 전체에게 트라우마가 될 법한 참상은 아니더라도 운 좋게 나를 비껴가 다른 이에게 도착한 비극은 매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비극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깝게 위치했던 루돌프 가족보다 더 생생하게 집 거실에서 참상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 전쟁 중인 가자 지구에서 쌍둥이 아이들의 출생 신고를 위해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폭탄이 떨어서 가족을 잃은 아버지가 '4일'이라 적힌 하얀 시트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내 안방에서 본다.
그런 비극을 접하면 끔찍함과 안타까움이 밀려 들어오지만 이내 스쳐 지나가 버린다. 당장은 내 허리의 통증이 더 크게 와 닿고 오늘 저녁 아이들에게 뭘 해 먹일지가 더 고민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영화 위에 나의 일상이 겹치면서 모른 척 하고 지내던 불편함을 조금은 더 모른 척 하기 어렵게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 설탕 들고 기다리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도망가고 수용소의 사람들을 위해 손에 흙을 묻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오늘 밤 잠 들기 전에 누워 가족과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혐한세력' 뛰어넘은 K 물결... 일본 사로잡은 교토국제고
- 전 이사장과 교장의 잇따른 부고, 충암학원에 무슨 일이
- 대통령실 "오염수 검증에 1조 6천억 낭비, 야당 사과해야"
- 법과 정의 실종된 윤석열 정부, 폭염만큼 견디기 힘들다
- '유퀴즈' 나와 유명해진 '운사모', 이 사람이 만들었다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김건희 효과? 권익위의 명절 선물
-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통령실 이유 설명 없이 "관저 증축 불법 아냐"
- 정신병원 환자 유가족 "2주 만에 죽은 딸, CCTV로 겨우 확인"
- "대단한 아이들"... 교토국제고 우승, 일본 언론은 이걸 주목했다
- 독립기념관 앞 '김형석 아웃' 현수막 10개 철거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