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여행 떠나 1평 땅 영주됐다…눈물바다 만든 중년女 이야기
프랑스 코미디 ‘뒤죽박죽 내 인생’
55세 중년 위기 여성 평온 찾는 여정
필리에르 감독, 촬영 후 암 별세 유작
만나던 애인과는 흐지부지 끝났다. 카피라이터로서 쓰는 광고 문구의 반응도 예전 같지 않다. 이혼 후 아빠와 사는 10대 딸은 갈라선 부모를 원망하고, 홀로서기 한다던 맏아들은 생활비가 없다며 화장실 휴지를 꾸러 찾아왔다.
괜찮게 살아온 줄 알았던 인생이 새삼 낯설고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지난 22일 개막한 제26회 서울국제영화제(SIWFF) 개막작으로 공개된 ‘뒤죽박죽 내 인생’ 속 55세 프랑스 여성 바르베르 비셰트(아녜스 자우이) 얘기다. 2006년 이 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신경쇠약 직전의 신부’(2005), ‘마고가 마고를 만났을 때’(2018) 등 여성의 생애 주기별 혼란상을 섬세한 코미디에 담아온 소피 필리에르 감독의 7번째 장편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동갑내기 감독 겸 배우 아녜스 자우이(‘타인의 취향’ ‘룩 앳 미’)가 주연을 맡았다.
황혜림 프로그래머는 "'뒤죽박죽 내 인생‘은 나를 구성하는 본질은 뭘까 질문을 던진 영화다. 붕괴의 시간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역으로 웃음의 쓸모를 생각해보게 한다“고 설명했다. SIWFF는 바로 이 ‘웃음의 쓸모’를 슬로건으로 38개국 132편의 초청작을 선보인다.
중년의 위기에 정신병원…삶 붕괴한 55세 코미디
한때 시집을 냈던 비셰트는 시리얼 광고문구 마감이 임박한 순간에도, 자조적인 시 구절만 떠오른다. 이제는 귀찮게만 느껴지는 샤워를 죽기 전까지 대체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가, 같은 잡생각 같은 것들이다. 폐경은 이미 지났고, 웬만한 무례에도 이력이 났지만, 가벼운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기만 하다. 큰마음 먹고 퇴사를 결심한 날, 청각장애인인 척 카페에서 접근해온 소녀들은 알고 보면 그의 지갑의 돈을 노린 좀도둑들.
영화의 전반부가 소소한 일상 시트콤 같다면, 후반부는 비셰트의 뒤늦은 자아 찾기 여정을 마술적 리얼리즘을 가미해 그려냈다. 퇴원 후 비셰트는 아들‧딸과 함께 가려던 여행을 혼자 떠나기로 한다. 할머니 댁이 있던 영국 동네를 들러 옛 친구와 해후 이후 비셰트가 발길을 재촉하는 곳은 외딴 영국 산골동네다.
실제 말기 암 선고받은 58세 감독 택한 엔딩
필리에르 감독의 개인사와 겹쳐지는 엔딩신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던 도중 말기 암을 발견한 그는 주연 자우이를 비롯한 가까운 동료들과 촬영을 마친 직후 세상을 떴다. 극 중 주인공과 비슷한 불과 58세였다. 편집 등 마무리는 동료들이 대신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으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때 장내는 눈물바다가 됐다.
영화에서 비셰트가 내면의 안식을 되찾는 외딴 산골의 작은 땅은 마치 그의 한 몸을 뉠 묘지처럼 다가온다. 각본을 쓸 때만 해도 암이란 걸 몰랐다지만, 촬영하는 동안 암 투병을 겪은 감독 자신의 초상이 자연스레 극 중 비셰트에 투영된 건지도 모른다. “페미니즘과 뉴웨이브 흐름 속에 등장해 친밀한 익살과 낭만주의를 넘나들었다”(르 몽드)고 평가받는 코미디 감독은 자기 죽음을 뒤늦게 발견한 삶의 눈부심을 찬양하는 유고작 속 성숙한 웃음의 질료로 삼았다.
역대 최다 3581편의 영화가 출품된 올해 SIWFF에선 이를 비롯해 ‘웃음의 쓸모’를 재발굴한 국내외 여성 감독의 초청작이 오는 28일까지 서울 CGV연남‧CGV 홍대 등에서 상영된다. 아시아의 허안화‧오기가미 나오코, 미국의 제인 쇼언브런 등 여성 거장, 신진 감독의 신작에 더불어 몸의 표현에서 존재의 사유에 이르는 한국 여성 감독의 애니메이션, 디아스포라 창작자들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뒤죽박죽 내 인생’은 두 차례 상영이 남아있다. 24일 CGV연남, 27일 CGV 홍대에서 상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siwff.or.kr) 참조.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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